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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THE THRESHOLD OF WAR 전쟁의 문턱에서 본문
Chapter 9. THE THRESHOLD OF WAR 전쟁의 문턱에서
페이쓰 2025. 4. 15. 03:369
THE THRESHOLD OF WAR
9
전쟁의 문턱에서
1773년 4월
로버트 히긴스는 앙상한 체격의 젊은이였다. 옷이 아니면 뼈마디조차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을 것처럼 보일 만큼 말랐고, 피부는 창백해서 마치 그 몸을 통해 빛이 비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큰 파란 눈을 가졌고, 연한 갈색의 물결치는 머리칼을 지녔으며, 수줍은 성격 덕분에 버그 부인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를 자기 날개 아래에 두고 “이 아이를 좀 먹여 키워야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가 버지니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꼭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나도 히긴스 씨가 마음에 들었다. 순한 성격에 도싯(Dorset, 역: 영국 남서부 지역) 특유의 부드러운 억양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존 그레이 경이 그에게 베푼 관대함이 정말로 그렇게 이타적인 것인지 다소 의심스러웠다.
몇 해 전 홍역으로 함께 고생했던 경험 이후, 나 역시 마지못해 존 그레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로저가 이로쿼이족에게 붙잡혀 있을 당시 그가 브리애나에게 보여준 우정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구체적으로는 제이미를, 그리고 물론 그 외의 남자들도.
“보샹,” 나는 말린 세잎나물 뿌리를 펼쳐놓으며 혼잣말했다. “넌 정말 의심이 많은 인간이야.”
“그래, 맞아,” 등 뒤에서 익살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뭘 했다고 의심 중인데?”
깜짝 놀라 몸을 홱 돌리는 바람에 세잎나물 뿌리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 당신이었어?” 나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몰래 다가오는 거야?”
“연습이지,” 제이미는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사냥감 추적하는 감을 잃고 싶진 않으니까. 근데 혼잣말은 왜 해?”
“혼자 말하면, 적어도 내 말은 잘 들어주거든.” 나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제이미는 웃으며 뿌리들을 함께 주워줬다.
“그래서 누구를 의심하는 거야, 새서내크?”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솔직한 고백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존 그레이가 히긴스 군을 상대로 남색을 했거나,” 나는 툭 던지듯 말했다. “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
제이미는 약간 눈을 깜빡였지만, 놀란 기색은 없었다—그 자체로도 이미 그가 나와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봤음을 암시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뭐야?”
“일단, 그 아이 참 예쁘장하게 생겼잖아.” 나는 그에게서 뿌리를 한 줌 받아 거즈 천 위에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나이 또래 남자 중에 그렇게 심한 치질은 처음 봤어.”
“그걸… 자기가 보게 했단 말이야?” ‘남색’이란 말에 제이미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래도 직접 물어본 이상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 걸 막진 않았다. 그는 내가 그런 민감한 표현을 꺼내는 걸 불편해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설득하려고 좀 애썼지.” 나는 말했다. “그 얘기는 금방 하더니만, 막상 내가 진찰해보겠다고 하니까 별로 내켜하진 않더라고.”
“그 마음 이해는 간다.” 제이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기가 그런 데 보자고 하면 싫을 것 같아. 우린 부부인데도 말이지.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걸 보고 싶었던 거야? 단순히 기이한 의학적 호기심에서?” 그는 내 책상이 있는 쪽으로 경계하듯 시선을 던졌다. 그 위엔 커다란 검은색 의학 노트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혹시 거기다 그 불쌍한 바비 히긴스 엉덩이 그림 그리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럴 필요는 없어. 그 누구라도 치질이 어떤 모양인지 모를 의사는 없을 거야.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집트 사람도 앓았던 병인데.”
“그 사람들이?”
“성경에도 나와. 크리스티 씨한테 물어봐.” 나는 태연히 말했다.
제이미는 나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자기가 톰 크리스티랑 성경 얘기를 나눴다고? 자긴 정말 용감한 사람이야, 새서내크.” 크리스티는 지독할 정도로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고, 성경 말씀으로 사람 머리를 두들겨 패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역: 비유적으로 성경 구절로 상대를 압박하고 훈계하는 것을 말함)
“내가 아니라, 제르맹이야. 지난주에 나한테 ‘에머로즈’가 뭐냐고 묻더라고.”
“그게 뭔데?”
“치질이야. ‘그들이 말하되 우리가 그에게 돌려보낼 속건제는 무엇이뇨? 이에 대답하되 블레셋 방백의 수대로 금 치질 다섯과 금 쥐 다섯이니…’ 뭐 그런 식이었지.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그런 구절이었어. 크리스티 씨가 벌로 성경 구절을 필사하라고 시켰는데, 제르맹은 궁금한 게 많아서 자기가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거지.”
“근데 크리스티한테는 직접 못 물어봤겠네.” 제이미는 얼굴을 찌푸리며 콧날을 따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래서 제르맹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내가 알 필요가 없겠지?”
“거의 확실히 그렇지.” 톰 크리스티는 이 지역의 학교 교사로서 토지세(quitrent)를 대신 납부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규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 생각엔, 제르맹 프레이저 같은 아이 하나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그의 임무는 이미 값어치를 다 했다고 봤다.
“금 치질이라…” 제이미는 중얼거렸다. “그거 꽤 기발하군.”
그는 때때로 어떤 끔찍하고 무모한 생각—누군가가 다치거나 죽거나, 혹은 종신형을 받을 수도 있는 종류의 생각—이 떠오르기 직전에 짓는 약간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볼 때면 항상 약간 불안했다. 이번에도 금빛 치질에서 출발한 그의 사고 흐름이 어디로 향하든, 그는 결국 그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럼. 우리 이야기하고 있던 게 바비의 엉덩이였던가?”
“맞아요. 히긴스 씨의 ‘에머로즈’를 보고 싶었던 이유 말인데요,” 나는 대화를 본론으로 되돌리며 말했다. “그 상태를 완화시키는 게 나을지, 아니면 아예 제거하는 게 나을지를 판단하려고 했던 거예요.”
제이미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그걸… 제거한다고? 어떻게? 당신 그 조그만 칼로?” 그는 내가 수술 도구를 넣어둔 케이스를 힐끗 보더니 어깨를 움츠렸다.
“할 수는 있어요. 물론 마취 없이 하자면 꽤 아플 거예요. 근데 제가… 떠나기 직전쯤엔 훨씬 간단한 방법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었거든요.”
순간, 병원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밀려왔다. 나는 거의 그 병원의 소독약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간호사와 잡역부들의 분주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고, 아이디어와 정보로 가득한 연구 저널의 반짝이는 표지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사라졌고, 나는 히긴스 씨의 항문 건강을 최적 상태로 만드는 데에 있어 거머리와 실 중 어느 쪽이 더 적절할지를 따져보고 있었다.
“로울링스 박사님은 거머리를 추천했어요,” 내가 설명했다. “심한 경우엔 스무 마리에서 서른 마리까지 붙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딱히 혐오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도 몇 차례 거머리를 붙여본 적이 있었고, 나에게 별로 아프진 않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래. 근데 지금 그만큼이나 가지고 있진 않겠지? 내가 애들 데리고 가서 좀 잡아올까?”
제미와 제르맹은 할아버지와 함께 개울을 헤집고 다닐 구실만 있다면 신이 날 것이고, 진흙과 거머리에 뒤덮여 눈썹까지 흠뻑 젖은 채 돌아올 테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응, 나중에 시간 날 때는 부탁할게요. 근데 지금 당장은 필요 없어요. 거머리를 쓰면 일시적으로는 증상이 나아질 테지만, 바비의 치질은 혈전이 생긴 상태예요—굳은 피가 응고되어 있어요—” 나는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차라리 완전히 제거해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매듭결찰법이 가능하다고 봐요—그러니까 각각의 치질 밑동에 아주 단단히 실을 묶는 거예요. 그러면 혈액 공급이 차단돼서 결국 마르고 떨어져 나가요. 아주 깔끔하죠.”
“정말 깔끔하군,” 제이미가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엔 약간의 불안이 담겨 있었다. “그걸… 음, 전에 해본 적은 있어?”
“응, 한두 번쯤.”
“아.” 그는 입술을 오므리며 수술 장면을 상상하는 듯했다. “그… 음… 그게 진행되는 동안에도 바비가 똥은 잘 쌀 수 있을까? 좀 오래 걸리는 일 아닌가?”
나는 이마를 찌푸리며 조리대 위에 손가락을 탁탁 두드렸다.
“얘 문제는, 똥을 못 싼다는 거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드물게, 그리고 제대로 된 형태도 아니게 말이죠. 식단이 형편없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그를 향해 겨누듯 가리켰다. “자기가 말했어요. 빵, 고기, 맥주. 채소도, 과일도 없어요. 변비는 영국군 안에서 거의 전염병처럼 퍼져 있어요. 모든 병사들 항문에서 포도송이처럼 치질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대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자길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거야, 새서내크. 자기가 말을 얼마나 섬세하게 잘 하는지 말이야.” 그는 헛기침하며 아래를 힐끗 봤다. “근데 치질이 변비 때문에 생긴다 그랬지?”
“맞아요.”
“그래. 근데 말이지… 자기가 아까 존 그레이에 대해 말하던 거. 그러니까, 바비 엉덩이 상태가 혹시… 그거랑 관련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이야…”
“아.” 나는 잠시 멈췄다. “아니,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요. 사실, 그레이 경이 편지에서—어떻게 표현했더라?—‘그의 다른 질환들에 대해 내가 치료를 제안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바비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더라도 그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말했듯이, 치질은 워낙 흔한 질병이라서, 그가 나한테 일부러 치료해보라고 요청할 정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만약 그게 나중에 자기 자신한테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거머리와 변비 얘기 덕에 한동안 평정을 되찾았던 제이미의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그러니까,” 나는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약간 마음이 불편하달까… 히긴스 군을 ‘수리’하라고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비 히긴스의 엉덩이 문제에 대해 찜찜한 기분이 있었지만, 그걸 말로 꺼내 본 건 처음이었다. 막상 입 밖에 내고 나니, 내가 왜 이 문제에 꺼림칙함을 느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불쌍한 바비를 고쳐서 다시 돌려보내면… 그다음엔…”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말린 뿌리 쪽으로 몸을 돌려 괜히 뿌리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생각은 싫어,” 나는 찬장 문을 향해 말했다. “히긴스 씨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바비 히긴스는 앞날이 뻔하잖아. 틀림없이… 경이 원하면 뭐든 하겠지. 하지만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레이 경에 대해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돌아보니 제이미가 내 의자에 앉아 있었고, 거위기름 병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병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글쎄,” 나는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잘 알잖아. 당신 생각에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내 말은 흐지부지 끊겼다. 그때, 밖에서 툭—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떨어진 가문비나무 솔방울 하나가 현관 마루를 톡 건드렸다.
“난 존 그레이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도 알아,” 제이미가 마침내 말했다. 입꼬리에 약간의 쓴웃음을 띠며 나를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그 사람도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걸 많이 알고 있지. 하지만”—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병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단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그는 명예로운 사람이야. 히긴스 같은 부하를 이용하거나 악용하는 짓은 절대 안 할 거야.”
그 말투는 단호했고, 나는 안심이 되었다. 나도 존 그레이를 좋아하긴 했다. 그런데도… 그의 편지는 항상 정기적으로 시계처럼 정확하게 도착했고, 그런 규칙성이 어쩐지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처럼 묘한 불안을 일으켰다. 편지 자체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편지는 그 사람 자체를 닮았고—박식하고, 유머 있고, 진심 어린 글이었다. 그리고 그가 편지를 쓸 이유도 있었다.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사람,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잖아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를 보진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문 앞 나무들 너머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게 싫어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싫어.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 사람을 위해서도. 하지만 윌리엄을 생각하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망설였다.
“그레이 경이 처음엔 당신 때문에 윌리엄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죠,” 나는 조리대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하지만 나 그 둘이 함께 있는 거 봤잖아요. 지금은 윌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
“나도 그건 의심하지 않아.” 제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편한 듯 치마 주름에서 상상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의 얼굴은 닫혀 있었고, 나와 공유하고 싶지 않은 내면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나는 입을 열었다가, 그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멈췄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냐.”
“뭐?”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것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시선만 더욱 강하게 박혔다.
“당신 얼굴만 봐도 그게 ‘아무것도’가 아니라는 거 알겠는데, 새서내크. 뭐야?”
나는 코로 깊이 숨을 들이쉬며, 앞치마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냥… 그게 사실일 리 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그저 스쳐 지나간 생각일 뿐인데—”
그가 낮고 굵은 스코틀랜드식 추임새를 내뱉으며, 괜히 말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하라는 뜻을 전했다. 나는 그가 끝까지 안 듣고는 못 배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도 가끔 생각해본 적 있어요? 혹시 그레이 경이 윌리엄을 맡은 게… 그러니까, 윌리엄이 당신을 너무 닮았잖아요.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했고. 그레이 경은 당신을… 외모적으로 매력 있다고 느꼈고…”
말이 죽어버렸다. 제이미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걸 후회했다. 차라리 내 목을 스스로 베어버리고 싶을 만큼.
그는 잠시 눈을 감아 나를 보지 않게 만들었고, 양손은 단단히 쥐어진 채 손등부터 팔뚝까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는 손을 풀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아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고, 나를 정면으로 강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괴로워서 못 견디겠다, 그런 건 아냐. 알아.”
“물론이죠,” 나는 급히 말했다. 이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알아,” 그는 한층 더 날카롭게 반복했다.
굳어진 두 손가락이 다리 위를 한 번 두드렸다가 멈췄다. “그 사람한테 이사벨 던사니와 결혼할 거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도 그 생각이 스쳤어.”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마당에선 애드소가 풀숲에서 뭔가를 쫓고 있었다.
“내 몸을 내줬었지.” 제이미가 갑자기 말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밖을 향한 채였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잔뜩 긴장한 어깨를 보면 이 말을 꺼내는 데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느껴졌다. “감사의 뜻으로… 그랬다고 말했어. 하지만 그건—”
그는 몸을 확 틀며 무언가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이상한 동작을 취했다. “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던 거야. 내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그 사람이.”
“내 아들로 삼겠다는” 그 말에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말 속에 열린 상처를 어떻게든 감싸고 싶었다.
그는 내가 안아주려 하자 몸을 굳게 유지했지만, 대신 내 손을 잡고 꼭 쥐었다.
“정말… 알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놀라지 않았다. 수년 전 자메이카에서 존 그레이가 이 일에 대해 내게 말한 적 있었으니까. 다만, 그는 그때 자신이 진짜 어떤 제안을 받은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제이미는 내 손을 더욱 세게 쥐었고, 엄지로 내 손톱 윤곽을 따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그의 눈이 내 얼굴을 살피는 걸 느꼈다—의심해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가슴으로만 바라보던 익숙한 대상을 다시금 눈으로 바라보는 그런 방식으로.
그의 한 손이 올라와 내 이마선을 따라가더니, 두 손가락이 잠깐 광대뼈 위에 머물렀다가 내 머리칼 속으로 차가운 손길을 스며들게 했다.
“사람과 그렇게 가까워질 수는 없어,” 그가 마침내 말했다. “서로의 안에 들어가, 땀 냄새를 맡고, 몸의 털이 서로 스치도록 뒤엉키면서도, 그 사람의 영혼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건… 아니,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 순간 그가 블랙 잭 랜달를 떠올렸는지, 아니면 내가 죽은 줄 알고 결혼했던 레어리를 떠올렸는지 궁금했다. “그 자체로도 끔찍한 일이야.”
그리고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는 애드소가 풀숲을 박차고 뛰어들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큰 붉은 가문비나무 위에서는 흉내지빠귀 한 마리가 경고음처럼 날카롭게 울기 시작했다. 부엌에서는 무언가가 쨍그랑 떨어졌고, 이어서 빗자루질하는 규칙적인 사각거림이 들려왔다. 우리가 함께 쌓아올린 이 삶의 익숙한 소리들이었다.
나는 그런 적이 있었을까? 어떤 남자와 함께 자면서, 그의 영혼은 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이미의 말이 옳았다.
차가운 기운이 살갗을 스치듯 지나가고, 내 피부 위에 소리 없이 털이 솟았다.
그는 발끝에서부터 깊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묶어 놓은 머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어. 존은.”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람, 나를 사랑한대. 그리고 내가 그에게 그 사랑을 되돌려줄 수 없다면—그 사람도 그걸 알고 있었고—가짜 사랑으로 진짜를 대신하고 싶지 않다더라고.”
그리고 그는 물속에서 나온 개처럼, 온몸을 세차게 털어냈다.
“아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누군가의 푸른 눈을 닮았다는 이유로 그 아들의 몸을 탐하지는 않아, 새서내크. 그건 내가 장담하지.”
“그래요.” 내가 말했다. “근데… 하나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제이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나를 바라봤다.
“만약—그때 그 사람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그리고 당신이… 그러니까, 막상 겪어봤는데…”
나는 그럴싸한 표현을 찾느라 더듬거렸다. “기대만큼… 품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그 호숫가에서 그 사람 목을 꺾어버렸을 거야.” 제이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결과로 목이 매달린다 해도 상관없었어. 절대 그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난 그렇게 했지.” 제이미는 어깨를 반쯤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바비가 자발적으로 경의 침대로 간다 해도, 그건 자기 의지로 하는 일이겠지.”
누구든 엉덩이에 남의 손이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예전에도 그런 상황을 겪어봤고, 로버트 히긴스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다.
“자, 이건 별로 안 아플 거예요,”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최대한 가만히 계셔야 해요.”
“아, 네, 네! 진짜로 가만히 있을게요, 부인!” 그가 열렬하게 다짐했다.
나는 그를 진료용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셔츠만 입은 상태로, 손과 무릎을 네 발로 딛게 해서 수술 부위가 내 눈높이에 딱 오도록 위치를 잡았다. 필요한 겸자와 결찰용 실들은 오른쪽 작은 탁자 위에 준비되어 있었고, 만약을 대비해 옆에는 신선한 거머리 그릇도 놓여 있었다.
나는 테레빈유에 적신 천을 부위에 대어 소독했다. 그 순간 그는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약속대로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 우리는 아주 좋은 결과를 얻을 거예요,” 나는 말하며 긴 겸자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통증이 다시 생기지 않으려면, 식단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가 숨을 깊게 들이쉬는 사이, 나는 치질 하나를 집어 당겼다. 세 개가 있었다. 아주 전형적인 위치였다—시계 방향으로 9시, 2시, 그리고 5시. 잘 익은 산딸기처럼 부풀어 있었고, 색깔도 딱 그랬다.
“오우! 네, 네, 부인.”
“귀리죽이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겸자의 그립을 유지한 채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으로는 실을 꿰어둔 바늘을 들었다.
“매일 아침 빠짐없이 죽을 드세요. 요즘 버그 부인이 아침마다 귀리죽 주시던데, 대변 습관에 좀 변화가 있었나요?”
나는 실을 치질 밑동에 느슨하게 감은 뒤, 그 고리를 바늘로 살짝 위로 끌어올려 작은 올가미 모양을 만든 다음, 조였다.
“아아아… 오우! 음…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부인 … 똥 쌀 때 벽돌에 고슴도치 껍질 씌운 걸 내보내는 기분입니다. 뭘 먹든 별 차이 없어요.”
“이제는 달라질 거예요.” 나는 그를 안심시키며 실을 단단히 묶었다.
치질을 놓아주자 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자, 포도. 포도 좋아하죠?”
“아니요, 입에 넣으면 이 시린 느낌 때문에 질색입니다.”
“그래요?” 그의 치아는 썩은 것 같진 않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경계성 괴혈병일 수도 있었다.
“그럼 버그 부인께 건포도 파이를 만들어 달라고 할게요. 그건 쉽게 드실 수 있잖아요. 그레이 경댁에는 요리 잘하는 사람 있나요?”
나는 다음 치질을 목표로 삼아 겸자를 집어 들었다. 이제 감각에 익숙해진 바비는 이번엔 살짝 신음만 흘렸다.
“예, 부인. 인디언 분인데 마노키라고 합니다.”
“흠.”
고리 감고, 들어 올리고, 조이고, 묶고.
“그럼 내가 건포도 파이 레시피를 적어줄게요. 그 사람한테 가져가세요. 그 요리사가 고구마나 콩 같은 것도 요리하나요? 그런 식품이 변비에 꽤 효과적이거든요.”
“콩 요리는 하는 것 같은데요, 아마도… 하지만 경께서는—”
나는 바람이 통하게 창문을 열어둔 상태였다. 바비가 평균적인 남자보다 더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깨끗한 것도 아니었기에, 통풍은 필수였다.
그 순간, 산길 입구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마구 장식이 흔들리는 소리.
바비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창문 쪽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마치 메뚜기처럼 당장이라도 수술대에서 튀어오를 듯 허리와 엉덩이에 힘을 줬다. 나는 그의 다리 하나를 잡았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창문을 가릴 방법은 셔터를 닫는 것밖에 없었고, 나는 빛이 필요했다.
“자, 이제 일어나도 돼요.” 나는 다리를 놓고 수건을 집으며 말했다. “내가 누가 온 건지 보고 올게요.”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큼 일어나 수술대에서 내려왔고, 바지부터 급히 집어 들었다.
나는 현관으로 나가, 힘겹게 마지막 경사를 올라 마당에 들어서는 두 남자를 마주했다. 바로 브라운스빌의 이름을 따온 그 브라운 형제, 리처드 브라운과 라이오넬 브라운이었다.
그들을 본 나는 조금 놀랐다. 브라운스빌에서 리지까지는 말 타고 꼬박 사흘은 걸리는 거리였고, 두 정착지 간에 특별한 교류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 방향으로 비슷한 거리인 세일럼까지도 갈 수 있었지만, 리지 사람들은 훨씬 자주 세일럼으로 향하곤 했다. 모르비안 사람들은 근면하고 장사에도 능해, 꿀, 기름, 소금에 절인 생선, 가죽 따위를 치즈, 도자기, 닭, 기타 가축들과 교환하곤 했다. 내가 알기로 브라운스빌 사람들은 체로키 부족에게 싼 물품을 팔거나, 아주 질 낮은 맥주를 만들어 내다 파는 게 전부였다. 굳이 찾아올 만한 가치는 없는 일이었다.
“안녕하시지요, 마님.”
형제 중 키가 작고 형인 리처드 브라운이 모자챙에 손을 갖다 댔지만 벗지는 않았다.
“댁의 남편은 댁에 계시오?”
“건초 헛간 옆에서 가죽 긁고 있어요.” 나는 들고 있던 수건에 손을 조심스레 닦았다. “부엌 쪽으로 돌아오세요. 사과주 좀 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소.”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집 뒤로 향해 걸어갔다.
라이오넬 브라운은 동생보다 키가 약간 더 컸지만, 마찬가지로 마른 체형에 담배잎 같은 갈색 머리를 가졌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노새를 마당에 그냥 놓아둔 채, 고삐도 대충 늘어진 상태로 가버렸다. 내게 돌보라는 뜻이었겠지. 노새들은 슬슬 마당을 가로질러 풀숲 가장자리로 가더니, 기회다 싶었는지 길게 자란 풀을 뜯기 시작했다.
“흥!” 나는 브라운 형제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예요, 저 사람들?”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바비 히긴스가 나와 있었고, 멀찌감치 현관 모서리에서 멀쩡한 쪽 눈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낯선 사람들에게 유난히 경계심이 있었고, 보스턴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이웃이에요, 뭐… 그런 셈이죠.”
나는 현관에서 뛰어내려 노새 한 마리의 고삐를 붙잡았다. 놈은 내가 현관 옆에 심어둔 복숭아 묘목에 입을 대려는 참이었다.
내가 그의 식사를 방해한 것에 불만을 느꼈는지, 노새는 귀를 쫙 젖히더니 귀청이 터질 듯 우렁차게 울어댔고, 이내 내게 입을 벌리며 물려고 했다.
“자, 부, 제가 할게요.”
이미 다른 노새의 고삐를 쥐고 있던 바비가 몸을 기울여 내 쪽 노새의 고삐를 받았다.
“이 자식아, 시끄러워! 또 짖기만 해 봐, 몽둥이 맛을 보게 해줄 테니!”
바비는 기병이 아니라 보병 출신이었다는 게 분명했다. 말은 당차게 했지만, 조심스럽고 소심한 몸짓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고삐를 툭 잡아당겼다. 그러자 노새는 귀를 뒤로 젖히더니, 그대로 그의 팔을 물어버렸다.
바비는 비명을 지르며 두 노새의 고삐를 놓쳤다. 울음소리에 놀란 나의 노새 클라렌스가 우리 안에서 우렁차게 울어대기 시작했고, 낯선 노새 둘은 그대로 그 방향으로 경쾌하게 뛰어갔다. 등자 가죽이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다행히도 바비는 크게 다치진 않았다. 노새 이빨에 피부가 살짝 찢어졌지만, 셔츠 소매로 핏방울이 조금 스며나오는 정도였다. 나는 천을 젖혀 상처를 살펴보려는 찰나, 현관에서 발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리지였다. 나무로 된 커다란 조리용 숟가락을 손에 쥔 채,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바비! 무슨 일이에요?”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즉시 자세를 바로잡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척했다. 이마 위로 내려온 곱슬 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 오! 별거 아니에요, 아가씨. 벨리알의 아들놈들이 잠깐 난리를 쳐서요.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그러곤 갑자기 눈이 뒤집히며 그대로 쓰러졌다. 마치 전원이 꺼진 인형처럼.
“어머!”
리지는 계단을 뛰어내려와 바비 옆에 무릎을 꿇고 그의 뺨을 다급히 두드렸다.
“괜찮은 건가요, 프레이저 부인?”
“글쎄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아마 괜찮을 거예요.”
바비는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고, 손목에서 맥박도 제법 안정적이었다.
“안으로 옮길까요? 아니면 타버린 깃털을 가져올까요? 아니면 수술실에서 암모니아 향정기라도? 아니면 브랜디?”
리지는 방향을 정하지 못한 꿀벌처럼 주위를 맴돌며 안절부절 못했다.
“아뇨, 금방 정신 차릴 것 같아요.”
실신은 대개 몇 초 내로 끝나는 법이고, 나는 그의 가슴이 다시 천천히 오르내리는 걸 보았다.
“브랜디… 조금이면 나아질 것 같아요…”
그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나는 리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곧장 집 안으로 달려가며 숟가락은 풀밭에 그대로 두고 갔다.
“조금 어지러워요?” 나는 동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팔의 상처는 단순한 긁힘에 불과했고, 내가 그에게 무슨 충격적인 치료를 한 것도 아니었기에—적어도 신체적으로는—대체 무슨 일일까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부인.”
그는 일어나려 애썼고, 얼굴은 종이장처럼 하얬지만 그 외엔 멀쩡해 보여서 일어나는 걸 막진 않았다.
“가끔씩요, 머리 주위에 벌떼 같은 반점이 빙빙 돌다가… 그냥 다 까매져요.”
“가끔이라고요? 그럼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어요?”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네, 부인.”
그의 고개는 바람에 흔들리는 해바라기처럼 휘청였고, 나는 그가 또 넘어질까봐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받쳐주었다.
“경께서… 프레이저 부인이 뭔가 해결책을 아시지 않을까, 그랬어요.”
“그분이… 아, 실신하는 거 알고 있었군요?”
물론 그렇겠지. 바비가 자주 눈앞에서 쓰러졌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포츠 박사님이 저를 매주 두 번씩 사혈하셨는데… 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럴만하죠.” 나는 비꼬듯 말했다. “치질 치료엔 좀 더 도움이 됐길 바라야겠네요.”
불쌍한 녀석은 피도 부족한 주제에 얼굴에 엷은 홍조까지 띄웠다. 그는 고개를 돌려, 풀밭에 떨어진 나무 숟가락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건… 아무한테도 말 안 했거든요.”
“정말요?” 나는 놀라 말했다. “그런데—”
“말하자면, 그건 말이죠… 그냥, 말을 오래 타서 생긴 거예요. 버지니아에서부터…”
홍조가 더 짙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피 같은 말 등에서 일주일이나 시달리고 나니까, 도저히 숨길 수 없을 만큼 아팠어요… 실례지만, 부인.”
“그럼… 그레이 경은 그 사실도 몰랐던 거예요?”
바비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헝클어진 갈색 곱슬머리를 이마 앞으로 흩날리게 했다. 나는 괜히 짜증이 났다—존 그레이의 동기를 오해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나를 바보처럼 느끼게 만든 존 그레이에게.
“그럼… 이제 좀 괜찮아요?”
리지의 브랜디는 오지 않았고, 나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잠시 궁금해졌다.
바비는 여전히 창백했지만, 용감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켜 섰다. 중심을 잡으려 애쓰며 눈을 깜빡였고, 그의 볼에 새겨진 “M” 낙인은 창백한 피부 위에서 화가 난 듯 붉게 도드라져 보였다.
바비가 기절한 탓에 집 반대편에서 나는 소리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야 나는 다가오는 말소리와 발자국을 인식했다.
제이미와 브라운 형제가 집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걸음을 멈췄다. 제이미는 약간 찡그리고 있던 이마를 더 깊이 찌푸렸고, 브라운 형제는 반대로 묘하게 들뜬 표정이었으나, 그 안에는 어두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럼 사실이었군.”
리처드 브라운은 바비 히긴스를 날카롭게 노려보더니, 제이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 땅에 살인자가 있군요!”
“정말입니까?”
제이미는 차갑고 예의바른 말투로 받아쳤다. “처음 듣는군요.”
그는 프랑스 궁정식 인사로 바비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몸을 펴며 브라운 형제를 향해 손짓했다.
“히긴스 씨, 이쪽은 리처드 브라운 씨와 라이오넬 브라운 씨입니다. 브라운 씨들, 제 손님이신 히긴스 씨입니다.”
*‘제 손님’*이라는 표현에는 확연한 강조가 실려 있었고, 그 말에 리처드 브라운의 앙상한 입술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꼭 다물어졌다.
“조심하게, 프레이저.”
그는 바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치 그가 연기처럼 사라지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잘못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요즘 같은 세상에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누구와 어울릴지는 내가 정합니다.”
제이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이로 깨무는 듯 또렷하게.
“그리고 당신은 아닙니다. 조셉!”
리지의 아버지 조셉 웸스가 집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그는 길 잃은 노새 두 마리를 데리고 있었고, 지금의 그것들은 아기 고양이처럼 얌전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조셉보다 훨씬 컸지만.
바비 히긴스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어깨만 살짝 으쓱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라운 형제는 말에 올라타며 무척 뻣뻣하게 등을 편 채, clearing을 빠져나갔다. 분노로 인해 등판이 더욱 곧아 보였다.
제이미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이어서 가벼운 저주 같은 걸 게일어로 중얼거렸는데, 나는 세세한 내용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내용상으로는 히긴스 씨의 치질과 방금 다녀간 손님들의 성격을 비교하는 것 같았고, 전자가 더 낫다는 결론 같았다.
“실례지만,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히긴스는 당황했지만, 기분을 맞추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제이미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서 머리나 식히라고 하지.”
제이미는 손을 휘젓듯 흔들며 브라운 형제를 단칼에 잘랐다. 그는 내 눈을 한번 마주친 뒤, 집 안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오게, 바비. 자네랑 할 얘기가 좀 있어.”
나는 호기심도 있었고, 혹시 또 바비가 쓰러질까 싶어 따라갔다. 그는 여전히 안색이 나빴지만, 걸음은 꽤 안정돼 있었다.
바비와는 대조적으로, 리지의 아버지인 웸스 씨는 딸처럼 체구는 작고 금발이었지만 얼굴은 발그레하게 건강 그 자체였다. 바비에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나는 조심스레 그의 바짓가랑이를 흘끗 살폈지만, 출혈은 없었다.
제이미는 서재로 향했고, 방문객용으로 쓰는 어설픈 의자와 나무 상자를 손짓해 가리켰다. 그러나 바비와 웸스 씨는 둘 다 앉지 않았다—바비는 당연히 사정이 있어서였고, 웸스 씨는 존경심 때문이었다. 그는 식사 때를 제외하곤 제이미 앞에서 좀처럼 자리에 앉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신체적, 사회적 거리낌 따윈 없었으므로, 가장 편한 의자에 털썩 앉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서재 겸 책상으로 쓰는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서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브라운 형제가 자기가 안전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다며, 나와 내 세입자들을 거기 가입시키러 왔었지.”
그는 내 쪽을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말았다.
“거절했지, 당신도 눈치챘겠지만.”
맥도널 소령이 말했던 이야기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위장이 살짝 뒤틀렸다. 결국, 시작된 거였다.
“안전위원회요?”
웸스 씨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비를 바라봤고, 바비는 점점 그 표정에서 혼란이 가시고 있었다.
“그렇단 말입니까.”
바비가 낮게 말했다. 그의 갈색 곱슬머리는 풀려 나와 귀 옆으로 흘렀고, 그는 그것을 귀 뒤로 슬쩍 넘겼다.
“그런 위원회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히긴스 씨?”
제이미가 눈썹 하나를 치켜올리며 물었다.
“예, 뵈었습니다. 아주 가까이서.”
바비는 눈 먼 쪽 아래를 손가락으로 살짝 짚었다. 그는 여전히 창백했지만, 이제는 평정심을 되찾고 있었다.
“폭도들입니다요. 노새떼 같긴 한데… 놈들이 더 많고, 더 사납죠.”
그는 삐뚤빼뚤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물린 셔츠 소매를 쓱쓱 폈다.
‘노새’라는 말에 나는 갑자기 생각이 났고, 대화를 끊고 벌떡 일어섰다.
“리지! 리지는 어디 있죠?”
나는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서재 문으로 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브랜디 가지러 간 것이 분명했다. 부엌에 있는 주전자에 브랜디는 충분히 있었고, 어젯밤 버그 부인을 위해 직접 꺼내는 걸 내가 분명히 봤다.
그렇다면 분명 집 안 어딘가에 있어야 했다. 설마 나가버린 건 아닐 테고—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어딨니?”
웸스 씨도 내 뒤를 따라오며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을 향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리지 웸스는 난로 앞에 쓰러져 있었다. 옷가지처럼 축 늘어진 몸이었고, 쓰러질 때 뭔가 붙잡으려 했던 듯 한 손이 바닥을 향해 뻗어 있었다.
“미스 웸스!”
바비 히긴스가 내 옆을 밀치듯 지나치며 다급하게 달려들었고,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엘리자베스!”
웸스 씨도 거의 같은 순간 내 옆을 밀고 들어왔고, 그의 얼굴은 딸만큼이나 창백했다.
“제가 진찰해야겠어요.”
나는 굳게 말하며 두 사람을 밀어냈다. “바비, 저기 긴 의자에 눕혀주세요.”
그는 조심스럽게 리지를 안고 일어섰고, 여전히 품에 안은 채로 의자에 앉았다. 앉을 때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니, 엉덩이는 여전히 아픈 듯했다. 뭐, 영웅이 되고 싶다면 지금은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목을 짚어 맥을 찾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이마에 흘러내린 창백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
한눈에 무슨 문제인지 짐작이 갔다. 그녀의 피부는 축축했고, 얼굴은 창백한 회색빛이 돌았으며,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오한이 시작되는 듯한 떨림이 느껴졌다.
“또 말라리아인가?”
제이미가 내 옆에 나타나며 물었다. 그는 웸스 씨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위로하면서도, 동시에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손길이었다.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리지는 몇 년 전 해안가에서 말라리아에 걸렸고, 가끔씩 재발 증세를 보이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쓰러진 건 1년이 넘도록 없던 일이었다.
웸스 씨는 깊고 들리는 숨을 들이쉬었고, 얼굴에 약간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말라리아에 대해 익숙했고, 내가 대처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도 몇 번 치료한 적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치료할 수 있기를, 나는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리지의 맥은 내 손가락 아래서 빠르고 가벼웠지만 규칙적이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 발작은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워서 불안감이 들었다. 전조는 있었을까? 내가 느끼는 우려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침대로 데리고 가세요. 담요 덮고, 발 밑에 따뜻한 돌 넣어주세요.”
나는 일어서며 바비와 웸스 씨를 번갈아 보며 빠르게 지시했다.
“나는 약을 달이러 갈게요.”
제이미는 내가 수술실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왔고,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거리를 두고 나서야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예수회 나무껍질, 다 떨어졌잖아?”
“맞아. 젠장.”
말라리아는 만성 질환이었지만, 지금까지는 계피나무로 알려진 친코나 나무껍질을 소량씩 꾸준히 복용시켜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겨울 동안 그것도 다 떨어졌고, 아직 해안가로 내려가 새로 구해올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 이제 어쩔 건데?”
“생각 중이야.”
나는 찬장 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줄 맞춰 놓인 유리병들은 대부분 비어 있거나, 잎사귀나 뿌리 찌꺼기가 바닥에 조금 남은 상태였다.
겨울 내 감기, 독감, 동상, 사냥 사고가 연달아 있었기에 약재는 바닥난 지 오래였다.
해열제. 일반적인 열이라면 쓸 수 있는 약초들은 많았다. 하지만 말라리아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도 적어도 개나무 뿌리와 껍질은 충분히 있었다. 가을에 이 정도쯤 필요할 거라 예견하고 엄청나게 모아뒀으니까.
나는 그것들을 꺼냈고, 잠시 고민 끝에 이 지역에서 ‘열병초’라고 불리는 용담류 약초가 든 병도 함께 꺼냈다.
“주전자 올려줘.” 나는 제이미에게 말했다.
뿌리와 껍질, 약초를 절구에 넣고 으깨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겉으로 드러난 열과 오한 증세를 완화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차, 충격도 치료해야겠지.
“꿀도 조금만 가져다줘요!”
이미 문까지 간 제이미를 향해 소리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참나무 마루에서 그의 발소리가 또박또박 울렸다.
나는 절구질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다른 가능성을 계속 굴렸다.
마음 한구석은 지금 이 응급상황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브라운 형제와 그 괴상한 위원회에 대해 듣게 될 시간을 잠시 미뤄둘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여전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결코 좋은 일일 리는 없었다.
그리고 제이미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오겠지—
마로니 열매. 로울링스 박사님은 ‘삼일열’이라고 부르는 말라리아 유형에 효과가 있다던데. 아직 남아 있을까?
나는 약장이 있는 선반 위를 재빨리 훑었다.
그러다, 검은 구슬 모양의 말린 열매가 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병 하나를 발견하고 멈췄다.
‘갈베리(gallberries)’ 라벨이 붙어 있었다.
내가 수집한 건 아니었고, 로울링스의 병 중 하나였다.
나는 그걸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몰랐지만… 뭔가 기억 저편에서 걸리는 게 있었다.
언젠가 들었거나 읽은 적이 있었는데—뭐였지?
무의식적으로 병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날카롭고 떫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약간 쓰고, 익숙한 향이었다.
여전히 병을 손에 든 채, 나는 커다란 검정색 진료기록장이 놓여 있는 탁자로 가서 급히 앞쪽 페이지들을 뒤적였다. 이 책과 약장을 처음 소유했던 사람, 다니엘 로울링스가 남긴 초기 노트가 있는 곳이었다. 어디쯤이었더라?
나는 여전히 페이지를 넘기며, 희미하게 기억나는 메모의 형태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때 제이미가 돌아왔다.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와 꿀 접시를 들고, 그 뒤를 비어즐리 쌍둥이가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힐끗 보기만 하고 말았다. 저 아이들은 꼭 꼭두각시 인형처럼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곤 했기 때문에,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리즈 아가씨 많이 아프신 거예요?” 조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으며 제이미 너머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엿보았다.
“그래,”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의 말에 반응하긴 했지만, 집중은 절반쯤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 마. 약을 만들고 있으니까.”
드디어 찾았다. 간결한 메모 한 줄—환자 치료 기록의 말미에 마치 뒤늦게 덧붙인 것처럼 적혀 있었다. 증상으로 보아 말라리아가 명확해 보였고, 나는 불쾌하게 마음이 철렁였다. 그 환자는 사망했었다.
“예수회 나무껍질을 구해준 상인의 말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갈베리(gallberry)’라 불리는 식물을 사용한다고 한다. 쓴맛이 친코나 나무껍질 못지않으며, 삼일열과 사일열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여겨진다. 실험용으로 약간을 수집해 두었으며, 기회가 되면 차로 달여볼 생각이다.”
나는 말린 열매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깨물었다.
곧장 퀴닌 특유의 매운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이와 동시에 엄청난 침이 솟구쳤고, 쓴맛에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이건 정말이지, 갈베리답군!
나는 창문 쪽으로 달려가 약초밭 위로 침을 뱉었고, 계속해서 뱉어댔다. 그 옆에서 쌍둥이들은 킥킥대며 킬킬 웃고 있었다. 갑작스런 광경이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새서내크?”
걱정과 웃음이 엇갈리는 얼굴로 제이미가 물었다. 그는 주전자에서 진흙 잔에 물을 따르고, 꿀 한 덩이를 넣어 나에게 건넸다.
“괜찮아…” 나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떨어뜨리지 마!”
케지 비어즐리가 갈베리 병을 들어 조심스레 냄새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병을 내려놓지는 않고, 대신 형에게 넘겼다.
나는 꿀물이 담긴 잔을 단숨에 마셨다. “저 열매들—퀴닌 비슷한 성분이 들어 있어.”
제이미 얼굴이 즉시 바뀌었다. 걱정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럼 리지를 도울 수 있는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열매가 얼마 없네.”
“그게 필요한 거예요, 리지 아가씨한테?”
조가 내 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작디작은 병을 든 손 위로 까만 눈이 번뜩였다.
“맞아,” 나는 놀라며 대답했다. “설마, 너희…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아는 거야?”
“예, 아줌마.” 케지가 대답했다. 여느 때처럼 약간 큰 목소리로. “인디언들이 갖고 있어요.”
“어느 부족?”
제이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체로키요.” 조가 어깨 너머로 어림잡아 손짓했다. “저 산 쪽에 사는.”
설명이야 막연했지만, 두 아이의 행동은 확실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동시에 몸을 돌렸고, 당장이라도 갈베리를 구하러 달려갈 태세였다.
“잠깐만 기다려라, 얘들아.”
제이미가 케지의 옷깃을 낚아채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마. 결국 거래할 물건이 필요할 테니까.”
“우리 가죽 많아요, 선생님.”
조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올해 사냥이 아주 좋았거든요.”
조는 훌륭한 사냥꾼이었고, 아직 케지는 청력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아 혼자 사냥하긴 어려웠지만, 형이 덫을 놓고 회수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이언이 말하길, 비어즐리 형제의 오두막에는 비버, 담비, 사슴, 담황족제비 가죽이 지붕에 닿을 만큼 쌓여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선 늘 마른 피, 사향, 그리고 차가운 털 내음이 은은히 풍겼다.
“그래? 그럼 퍽 관대하구나, 조. 고맙다.”
제이미는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눈빛이었지만, 동시에 내 동의를 구하는 듯했다.
나는 쓴맛을 삼키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요.”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가실 거면, 제가 드릴 물건도 좀 있고, 거래 시 요청할 것도 알려드려야 하니까요. 내일 아침에 출발하실 거죠?”
비어즐리 형제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 들썩이고 있었지만, 제이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없이, 몸짓 하나 없이, 그는 나를 어루만지듯 바라보았다.
“그래,”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룻밤은 묵고 갈게.”
그는 비어즐리 형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조, 위층에 가서 바비 히긴스 좀 불러와줘. 할 얘기가 있어.”
“그 사람이 리지 아가씨랑 같이 있어요?”
조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고, 그의 형도 비슷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자기가 뭘 한다고, 그 방에 들어가 있어요? 리지 아가씨가 약혼 중인 것도 모른단 말입니까?”
케지가 의분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도 함께 있어.”
제이미는 그들을 안심시키듯 덧붙였다.
“그 애 명예는 지켜지고 있으니 걱정 마.”
조는 코웃음을 잠깐 흘렸지만, 결국 형제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굳게 마음을 먹은 듯 단단한 어깨로 나란히 걸어나갔다.
그들에겐 리지의 순결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꽉 들어차 있었다.
“정말 할 거에요?”
나는 절구공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인디언 대리인이 되겠단 말이에요?”
“그래야 할 것 같다.”
제이미는 말했다.
“내가 안 하면—리처드 브라운이 하겠지. 그건… 막아야 할 일이야.”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 팔꿈치를 부드럽게 건드렸다.
“얘들한텐 열매만 받아오게 하고, 나는 하루나 이틀쯤 더 머물지도 몰라. 그쪽 사람들과 이야기 좀 해야 하니까.”
그 말은 곧, 자신이 이제는 영국 왕실을 대표하는 대리인으로 체로키 부족에게 인사하고, 후에 다른 부족 대표들이 모일 수 있도록 협상하고 선물 교환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아래로 작은 두려움이 올라왔다. 알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끔찍한 일이 곧 일어날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그게 바로 ‘오늘’일 줄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너무 오래 안 머무를 거죠?”
나는 그만 말이 튀어나왔다. 내 불안을 그에게 짐 지우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손을 내 허리 뒤쪽에 잠시 올려놓았다.
“걱정 마, 오래 안 걸릴 거야.”
복도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아마 웸스 씨가 비어즐리 형제를 내보내고, 바비까지 함께 데리고 내려온 듯했다.
그들은 말 없이, 바비를 흘끔흘끔 흘겨보며 떠났다.
바비는 그런 시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제가 필요하시다고 하셨다죠, 선생님?”
바비가 말했다. 다행히 얼굴에 약간 혈색이 돌아왔고, 몸도 제법 안정돼 보였다.
그는 내가 수술을 했던 시트가 아직 깔려 있는 탁자 쪽을 불안하게 힐끗 보더니,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고개만 저었다. 치질 치료는 나중에 마저 하기로 하자.
“그래, 바비.”
제이미는 짧게 손짓해 의자를 가리키며 그를 앉으라고 했지만,
내가 의미심장하게 헛기침을 하자, 그도 멈칫하며 결국 본인도 앉지 않고 탁자에 기대 섰다.
“방금 온 두 사람—브라운 형제라 하더군. 저 멀리 정착지가 있지.
‘안전위원회’라는 걸 들어봤다고 했지? 그럼 대충 뭘 하는 자들인지 짐작할 거야.”
“예, 선생님. 저 브라운들… 혹시 절 노리셨습니까?”
바비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말하는 중간 목젖이 잠깐 튀는 게 보였다. 긴장을 삼킨 듯했다.
제이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금 창문으로 기울어진 햇살이 들어와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붉은 머리카락은 불타는 듯 빛났다.
그 속엔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한 은빛 가닥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맞아.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더군. 어디선가 들은 모양이야. 오는 길에 누구한테 네 목적지를 말한 적 있나?”
바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 바비를 왜 찾은 거예요?”
나는 뿌리와 열매를 절구에서 그릇으로 옮기며 물었다.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리기 시작했다.
“그건 정확히 말하질 않더군.”
제이미는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뭐, 애초에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지만. 내가 말했지—내 벽난로 옆에서 함께한 손님을 데려가려면, 내 죽은 몸… 그리고 그들의 죽은 몸을 밟고 가야 할 거라고.”
“그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바비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 사람들… 보스턴 일은 알고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전 그 이야긴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제이미의 미간이 조금 더 깊게 찌푸려졌다.
“그래. 걔네는 내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는 척했어.
네가 살인자라는 걸 모르고 숨겨주고 있다면서, 공공의 안녕을 해치는 자를 숨기고 있다고 하더군.”
“뭐… 첫 번째 말은 틀린 것도 아니지요.”
바비는 자신의 뺨에 새겨진 낙인을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만졌다. 마치 여전히 화끈거리는 상처인 듯. 그러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요즘 저는 누구에게 위협이 될 만큼 용기도 힘도 없는걸요.”
“중요한 건, 바비,” 제이미가 말을 이었다.
“지금 그 사람들이 네가 여기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는 거야. 당장 와서 널 납치해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근처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겠지. 때가 되면 내가 네가 그레이 경에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호위를 붙일 거야.
아직 안 끝났죠?” 그가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조금 남았어요,”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바비는 순간 걱정스런 눈빛을 보였다.
“그럼 됐네.”
제이미는 바지 허리춤에 손을 넣더니, 셔츠 자락에 가려져 있던 권총을 꺼냈다. 금으로 장식된, 꽤 고급스러운 권총이었다.
“항상 곁에 두게.”
그는 바비에게 권총을 건넸다. “화약이랑 총알은 찬장에 있어. 내가 없는 동안, 내 아내와 가족들을 좀 지켜줄 수 있겠나?”
“오!”
바비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권총을 자기 바지에 집어넣었다.
“그럼요, 선생님. 맡겨만 주세요!”
제이미는 그를 향해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고맙네, 바비. 든든하군.”
그는 덧붙였다.
“혹시 내 사위 좀 찾아줄 수 있겠나? 떠나기 전에 잠깐 얘기할 게 있어서.”
“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바비는 어깨를 쫙 펴고 결연한 표정으로 나섰다. 시인이었던 얼굴에 굳은 결심이 어려 있었다.
바깥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나는 조용히 물었다.
“브라운 형제들… 그 사람이랑 무슨 짓을 하려던 걸까요?”
제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느님만 아시지. 사거리 나무에 목을 매달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두들겨 패서 산에서 쫓아냈을지도 모르지. 자기들이 ‘사람들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을 테니까. 위험한 범죄자로부터, 뭐 그런 명목으로.”
그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정부의 권력은, 피지배자의 정당한 동의에서 비롯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용했다.
“‘안전위원회’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분명한 공공 위협이 필요하지.
브라운 형제가 그걸 정확히 간파한 거야.”
제이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 누가 한 거지? 피지배자의 동의라니.”
“토머스 제퍼슨,”
나는 으쓱하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 2년 뒤에 그렇게 말할 거야.”
“그건 또 2년쯤 뒤에, 록이라는 신사한테서 베낀 거지.”
제이미가 반박했다.
“그래도 리처드 브라운, 제법 교육은 받은 사람인가 봐.”
“그 말은 즉, 나는 아니란 거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런데, 브라운 일당이 위험할 수 있다면… 그 권총을 바비한테 준 게 정말 괜찮은 일이었을까?”
제이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총들은 내가 써야 하니까.”
제이미가 말했다.
“그리고 저 아이가 그 총을 실제로 쏠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억제 효과를 기대하는 거야?”
나는 다소 회의적이었지만,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 그것도 있지만, 난 바비를 믿는 거야.”
“무슨 뜻이야?”
“자기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면 총을 쏘지 않을지도 몰라—하지만, 당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를 거야.”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목덜미에 서늘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차피 가까운 거리일 테니까 빗맞을 일도 없겠지.”
“아, 그거 정말… 위안이 되네.”
나는 말했다.
“근데 그걸 대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얘기해봤거든.”
그는 짧게 대답했다.
“보스턴에서 쏜 그 남자가 그 애가 처음 죽인 사람이래. 다시는 그런 일 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
그는 몸을 곧게 펴더니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으로 조용히 조작대 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청소하라고 내놓은 작은 의료 기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 들고 닦으며, 조심스레 상자에 가지런히 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다가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조그만 지혈용 인두와 메스 몇 자루가 테레빈유가 담긴 비커에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마른 천으로 닦은 뒤, 상자 안에 나란히 정리했다.
삽 모양의 금속 인두 끝은 이미 사용으로 그을려 있었고, 메스의 날도 부드럽게 닳아 있었지만, 날 끝은 여전히 은빛으로 날카롭게 반짝였다.
“우린 괜찮을 거야.”
나는 조용히 말했다. 안심시키려는 말이었지만, 내 목소리엔 묘한 질문이 섞여 있었다.
“알고 있어.”
그는 말했다. 마지막 인두를 상자에 넣었지만, 뚜껑을 닫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양손을 조작대 위에 평평하게 올려두고, 정면을 응시했다.
“가고 싶지 않아.”
그는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걸 하고 싶지 않아.”
그가 나에게 한 말인지, 혼잣말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단지 체로키 마을로 떠나는 여정을 말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나도 그래.”
나는 속삭였다.
그리고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숨결이 내 볼에 닿을 만큼 곁에 섰다.
그는 그제야 손을 들어 나를 끌어안았고, 우리는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안긴 채 서 있었다.
린넨과 먼지, 햇볕에 데운 살냄새 속으로 쓴 약초차 냄새가 스며들었다.
앞으로도 결정해야 할 일은 많았다. 선택해야 할 길, 취해야 할 행동들—그 모든 것이 우리 앞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단 하루, 단 한 시간, 단 하나의 의지 표명으로 우리는 ‘전쟁’이라는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Outlander아웃랜더 > 6. A Breath of Snow and Ash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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