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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s Holic
Chapter 6. Ambush 매복 본문
6장
매복
이언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손이 반사적으로 도끼자루를 움켜쥐었다. 아니, 움켜쥐려 했지만 손에 잡힌 것은 도끼가 아니라 바지였다. 순간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곧장 몸을 일으켜 어둠 속에서 무언가 형태를 알아보려 애썼다.
번개처럼 머리를 가르며 통증이 몰려들었다. 그는 숨도 못 쉬고 헉 소리를 삼킨 채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래쪽 어둠 속 어딘가에서 롤로가 놀란 듯 작게 “우웁?” 하고 소리를 냈다.
세상에.
그의 코를 찌른 건 이모의 수술실에서 풍기는 날카로운 냄새들이었다. 알코올, 그을린 심지, 말린 약초들, 그리고 그녀가 페니실린이라 부르는 고약한 약탕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언은 눈을 감고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올린 뒤 이마를 얹고 입으로 천천히 숨을 쉬었다.
무슨 꿈을 꿨더라?
위험한 꿈, 폭력적인 꿈이었던 건 분명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았고, 대신 숲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쫓아오는 느낌, 어딘가에서 뒤따라오는 존재의 기척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소변이 급했다. 침대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머릿속이 쑤셔오는 고통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버그 아주머니가 요강을 놔두고 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촛불은 꺼졌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그것을 찾을 정신은 없었다. 희미한 불빛이 문 쪽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약간 열어두었고, 부엌 벽난로에서 나온 빛이 복도를 따라 번지고 있었다. 그 불빛을 기준 삼아 그는 창문으로 갔다. 창을 열고 덧문 고리를 풀어내고는, 봄밤의 시원한 공기가 밀려드는 창가에 서서 눈을 감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일을 보았다.
그제야 좀 나아졌다. 하지만 소변을 본 뒤엔 속이 미묘하게 울렁거리는 느낌과 여전히 욱신대는 머리가 다시금 또렷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두 팔을 무릎 위에 얹고, 그 위에 머리를 숙였다. 모든 불편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부엌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귀를 기울이니 분명히 들렸다.
삼촌 제이미와 저 맥도널드, 그리고 늙은 아치 버그가 함께 있었다. 가끔씩 이모 클레어의 목소리도 들렸는데, 그녀의 영어 억양은 스코틀랜드식 가우뚱한 가엘어 말투들과 대조적으로 날카롭게 들렸다.
“인디언 담당 관리가 되어보는 건 어떤가요?” 맥도널드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게 뭐지? 이언은 생각했다가 곧 기억이 떠올랐다. 아, 그렇지. 왕실은 부족들을 상대로 연설하고, 담배나 칼 같은 선물을 주고, 황당한 얘기들을 전하라고 사람들을 파견하곤 했다. 독일 출신의 ‘조지 왕’이 다음 만월에 토끼달(火月)의 회의에 찾아와 부족들의 모닥불 앞에 앉아 사람처럼 이야기할 것이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그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의도는 뻔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인디언들을 꾀어내 영국 편에 서게 만드는 것.
하지만 지금 전쟁이 왜 필요하다는 거지?
프랑스는 이미 물러났고, 캐나다 북부로 후퇴한 상태였다.
아. 그제야 브리아나가 말했던 ‘새로운 전쟁’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땐 반신반의했었는데, 어쩌면 그녀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를 계속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얘기든, 그 어떤 것도.
롤로가 다가와 몸을 그의 옆에 기대며 앉았다. 이언은 몸을 뒤로 젖혀, 롤로의 두꺼운 털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가 스네이크타운에 살던 시절, 인디언 담당 관리가 한 명 방문한 적이 있었다. 눈이 자꾸 흔들리고 목소리에 떨림이 있는 통통한 사내였다. 그 남자—이름이 뭐였더라?—모호크족은 그를 ‘나쁜 땀(Bad Sweat)’이라 불렀고, 정말 그랬다. 무슨 중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악취를 풍겼다. 이언 생각에, 그는 카니엔케하카(역: 모호크족의 자칭 이름)에 전혀 익숙지 않은 듯했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언제든 자기 두피를 벗길까봐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호크족은 그를 장난감 삼아 즐겼고, 몇몇은 실제로 장난으로라도 벗기려 했을지도 모른다—테왁테뇽(역: 부족 지도자)이 예의를 갖추라고 하지 않았다면.
이언은 통역을 맡았었다. 마지못해 했지만, 어쨌든 맡아서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부류로 자신을 묶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오히려 모호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삼촌 제이미라면… 훨씬 잘할 것이다. 과연 하게 될까?
이언은 희미한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제이미 삼촌이 결정을 강요당하는 일은 없겠다는 걸 곧 알아차렸다. 맥도널드는 봄 개울에서 미끄러지는 개구리를 잡으려는 사람처럼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롤로에게 몸을 기댔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클레어 이모는 며칠 동안은 기분이 나쁠 거라고 했으니, 아직 죽지는 않을 거였다. 정말 죽을 거였으면, 이모가 그를 롤로에게만 맡기고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덧문은 아직 열려 있었고, 밤공기가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봄밤 특유의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공기였다. 롤로가 코를 치켜들고 킁킁거리더니, 신이 난 듯 낮게 끙 소리를 냈다. 아마 주머니쥐나 너구리 냄새였을 것이다.
“가 봐, 얼른.” 이언은 몸을 일으키며 개를 가볍게 밀었다. “난 괜찮아.”
롤로는 수상하다는 듯 그를 한 번 더 킁킁대고, 머리 뒷부분에 난 봉합 부위를 핥으려 했다. 이언이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덮자, 그제야 그만두었다.
“가라고 했잖아!” 이언은 개의 머리를 살짝 툭 쳤다. 롤로는 킁 소리를 내며 방 안을 한 바퀴 빙 돈 뒤,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밖으로 사라졌다. 땅에 착지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곧 끔찍한 비명과 함께 덤불을 찢으며 짐승들이 달아나는 소리가 났다.
놀란 목소리가 부엌 쪽에서 터져 나왔고, 복도에서 제이미 삼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수술실 문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이언?” 삼촌이 부드럽게 불렀다. “어디 있느냐, 얘야? 무슨 일 있느냐?”
이언은 일어서려 했지만,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이며 몸이 휘청거렸다. 삼촌이 그의 팔을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무슨 일이냐, 얘야?”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졌고, 문 틈의 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삼촌의 모습이 보였다. 손엔 소총을 들고 있었고, 얼굴엔 걱정과 동시에 익살스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스컹크는 아닌 것 같군.”
“뭐, 스컹크든 아니든…” 이언은 머리를 조심스레 만지며 말했다. “롤로가 퓨마를 쫓았거나, 이모 고양이를 나무 위에 몰아넣었거나 둘 중 하나일 거요.”
“그렇겠지. 퓨마가 상대론 더 나을 거야.” 삼촌은 소총을 내려놓고 창문 쪽으로 갔다. “덧문 닫을까? 아니면 좀 더 공기가 필요하냐? 너 좀 핼쑥해 보이거든.”
“기분도 핼쑥해요.” 이언이 인정했다. “그냥 열어두세요, 삼촌.”
“좀 더 잘래?”
그는 잠시 망설였다. 속이 여전히 울렁거렸고, 눕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수술실은 그 특유의 냄새들과, 반짝이는 작은 칼들,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도구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이미 삼촌은 그가 불편해하는 이유를 알아챘는지, 팔을 들어 이언의 팔꿈치 아래로 손을 넣었다.
“가자, 얘야. 위층 방에서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는 게 나을 거다. 맥도널드 소령이 옆방에 있긴 하지만.”
“괜찮아요. 근데 여기 있을게요.” 이언은 창문을 가리켰다. 고개를 움직이고 싶지 않아 손으로 가리켰다. “롤로가 곧 돌아올 거예요.”
제이미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여자들은 자꾸 잔소리를 하지만, 남자들은 그저 필요한 일을 할 뿐이었다.
삼촌은 말없이 그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곤 어둠 속에서 소총을 찾느라 이리저리 뒤적였다. 이언은 문득 조금쯤은 보살핌을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 한 컵만 주시겠어요, 삼촌?”
“엉? 아, 그래.”
클레어 이모는 미리 물병을 가까운 데 두어 놓았었다. 물 따라내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고, 곧 도자기 컵 가장자리가 그의 입에 닿았다. 삼촌이 등을 받쳐주었다. 굳이 필요는 없었지만, 그 손길이 따뜻하고 위안이 되어 반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밤공기에 식어 있었는지도 몰랐고, 잠시 몸을 떨었다.
“괜찮냐, 얘야?” 삼촌이 낮게 물으며 어깨를 감싸는 손에 힘을 줬다.
“응, 괜찮아. 삼촌?”
“음?”
“클레어 이모가… 전쟁 얘기하셨어요? 영국이랑, 곧 전쟁이 난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고, 삼촌의 큰 몸이 문 틈의 빛 속에서 멈춰 섰다.
“그래.” 그가 말했다. 손은 이언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이모가 말했지. 넌 들었냐?”
“아뇨, 브리아나 누나가요.” 이언은 머리를 조심히 돌려 옆으로 누웠다. “삼촌은… 믿으세요?”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믿는다.”
말투는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에 이언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아… 그렇군요.”
이불 아래 거위털 베개가 볼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삼촌의 손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걱정 마라, 이언,” 그가 낮게 말했다. “아직 시간은 있어.”
그는 소총을 들고 나갔다.
이언은 누운 채로 마당을 바라보았다. 능선 아래로 나무들이 내려가고, 블랙 마운틴의 경사면 너머로 검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별들이 가득했다.
뒤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버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높게 울려 나왔다.
“집엔 아무도 없어요, 선생님!”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불도 꺼져 있고, 벽난로도 꺼져 있어요. 이 늦은 밤중에 대체 어딜 간 걸까요?”
이언은 누가 사라졌는지 어렴풋이 궁금했지만,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다면, 삼촌이 해결할 테니까.
그 생각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마치 어린 시절, 하이랜드 새벽 어스름에 아버지가 마당에서 세입자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침대 속에 안겨 있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이불 아래서 따뜻함이 천천히 번졌고, 그는 다시 잠에 들었다.
달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브리아나는 그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에 별을 담은 요람 위로 기울어진 금빛 달이 떠오르며 빌린 듯한 빛을 뿌리고 있었지만, 그 아래 발밑의 오솔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발조차도 어둠 속에 잠겨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지만, 조용하진 않았다. 거대한 나무들 위로 잎사귀가 바스락거리고, 작은 동물들이 어둠 속에서 끼익대거나 킁킁대는 소리가 들렸으며, 가끔 박쥐의 날갯짓이 코앞을 스치며 날아 지나가기도 했다. 마치 밤의 일부분이 갑자기 떨어져 날아간 것처럼 느껴져 브리아나는 그럴 때마다 깜짝 놀라며 로저의 팔을 움켜쥐곤 했다.
“성직자의 고양이는 겁 많은 고양이일까?” 로저가 제안하듯 물었다. 그녀가 또 한 번 가죽 날개에 놀라 그를 붙잡았을 때였다.
“성직자의 고양이는… 감탄할 줄 아는 고양이지.”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며 대답했다. “고마워.”
오늘 밤 그들은 아마 자기 침대보다는 맥길리브레이 집 벽난로 앞에서 망토를 깔고 잘 확률이 높았지만, 그래도 젬미는 품에 안을 수 있으니 괜찮았다.
로저는 그녀의 손을 다시 한번 꼭 쥐었다. 그의 손은 그녀보다 크고 힘이 있었으며, 어둠 속에서 든든했다.
“괜찮아,” 그가 말했다. “나도 그 애가 보고 싶어. 오늘 같은 밤엔 가족이 한자리에 함께 있고 싶지.”
브리아나는 목 안에서 작게 소리를 냈다. 고마움과 공감의 표시였다.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어둠을 이겨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로저와의 연결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직자의 고양이는 아주 웅변적인 고양이였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장례식에서 말이야. 그 불쌍한 분들.”
로저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그의 입김이 공기 중에서 흰 김으로 피어나는 걸 보았다.
“성직자의 고양이는 대단히 당황한 고양이였지,” 그가 말했다. “당신 아버지 말이야!”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는 볼 수 없었지만.
“잘했어,”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음흠,” 그는 또 한번 코웃음을 쳤다. “웅변이라… 그런 게 있었다면, 그건 내 것이 아니었지. 내가 한 거라곤 시편 몇 줄 인용한 것뿐인데—어느 편이었는지도 모르겠어.”
“괜찮았어. 그런데 왜 그 구절을 선택했어?”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기도문이나, 스물세 번째 시편 같은 걸 할 줄 알았거든—다들 아는 거니까.”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그가 인정했다. “그럴 생각이었지.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오자…”
그가 말을 멈췄고, 그녀는 기억 속의 장면—차갑고 맨살처럼 드러난 무덤—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녀의 코에 아직도 그을음 냄새가 맴도는 것 같았다. 로저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팔꿈치에 그녀의 팔을 끼워 안았다.
“모르겠어,” 그는 거칠게 말했다. “그게 그냥… 더 어울리는 것 같았어.”
“그랬어,”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더는 그 주제를 파고들지 않고, 대신 가장 최근에 자신이 작업 중인 공학 프로젝트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우물에서 물을 퍼올릴 수 있는 수동 펌프에 관한 이야기였다.
“파이프만 있으면, 집 안으로 물 끌어들이는 건 식은 죽 먹기야! 이미 빗물 받아둘 저장통용으로 쓸 나무는 거의 다 구해놨어—로니만 내 말대로 통을 짜주면 샤워도 할 수 있지. 그런데 나무 가지를 파이프처럼 속 파내서 쓰는 건”—그녀는 펌프에 사용된 소량의 배관 방식에 대해 말했다—“우물에서 집까지만 하려고 해도 몇 달은 걸릴 거야. 개울까지 연결할 생각은 꿈도 못 꿔.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구리 파이프 같은 건 구할 수도 없고, 설령 돈이 있어도 윌밍턴에서 그걸 끌어올 수 있을 리가…”
그녀는 자유로운 손을 허공으로 던지며 좌절감을 표현했다.
로저는 그 말을 곱씹듯 걸으며, 신발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를 따라 일정한 리듬을 유지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콘크리트로 만들었잖아. 플리니우스 책에 레시피가 있어.”
“알지. 근데 그건 특정 모래가 필요해. 우리는 그 모래가 없어. 석회도 없어. 그리고—”
“그래도 진흙은 어때?” 그가 끼어들었다. “힐다 결혼식 때 그 접시 봤지? 갈색에 붉은 무늬가 있었던 큰 접시.”
“봤어,” 그녀가 말했다. “왜?”
“우테 맥길리브레이가 그러던데, 살렘에서 온 누가 만들었다고.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도자기 만드는 데선 꽤 이름 있는 사람이래.”
“분명 그런 말은 안 했을걸!”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말투만 바꾼 거지.” 로저는 아랑곳 않고 이어갔다. “중요한 건 그 접시가 독일에서 온 게 아니라 여기서 만든 거라는 거야. 그럼 적어도 불에 구울 수 있는 진흙이 이 근방에 있다는 거잖아?”
“아, 그렇네. 흠. 그거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그들은 그 얘기를 하며 거의 내내 길을 걸었다.
능선을 내려와 맥길리브레이 집에서 4분의 1마일쯤 떨어졌을 때, 브리아나는 목 뒤로 서늘한 기운이 스멀거리는 걸 느꼈다. 단순히 상상일 수도 있었다. 버려진 골짜기에서 본 광경 탓인지 숲의 어둠이 위협처럼 짓누르고 있었고, 그녀는 길 모퉁이마다 매복이 숨어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오른편 나무 사이에서 무언가 ‘딱’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가는 마른 가지가 꺾이는 소리였는데, 바람이나 짐승 때문은 아니었다.
진짜 위협은 늘 그만의 맛을 지니고 있다. 상상의 희미한 레모네이드와는 달리, 그건 생레몬즙처럼 강렬하고 뚜렷했다.
그녀는 로저의 팔을 꼭 잡았다. 그건 경고였고, 로저는 즉시 멈춰 섰다.
“뭐지?” 그가 속삭이며 칼자루를 쥐었다. “어디?”
그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총이라도 가져올 걸. 아니면 최소한 단검이라도. 지금 가진 건 주머니 속 스위스 군용 나이프뿐이고, 그나마도 쓸모없었다.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건 주변 환경이 제공하는 무기뿐이었다.
그녀는 로저의 몸에 밀착해, 그의 시야에서 손을 몸 가까이 붙여 가리켰다. 방향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어둠 속에서 바닥을 더듬었다. 몽둥이처럼 쓸 나뭇가지나 돌을 찾기 위해.
“계속 말해,” 그녀가 속삭였다.
“성직자의 고양이는 겁쟁이 고양이일까?” 로저가 제법 자연스러운 농담조로 말했다.
“성직자의 고양이는 맹렬한 고양이지.” 그녀도 장난스러운 어조로 맞받아치며, 한 손으로는 주머니를 뒤졌고, 다른 손으로는 돌을 움켜쥐었다. 진흙이 엉겨붙은 돌을 힘겹게 뽑아냈다. 손바닥에서 차고 묵직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오른편 어둠 속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뭐든 덤비면 창자를 갈라놓겠—”
“아, 당신들이었구먼.”
그녀의 뒤쪽, 숲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브리아나는 비명을 질렀고, 로저는 반사적으로 돌아서 위협을 향해 몸을 틀었다. 동시에 그녀를 뒤로 밀쳐냈다.
그녀는 밀려난 채로 뒤로 휘청이며 넘어졌다. 어둠 속에서 뿌리에 발이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 자리에서 달빛에 비친 로저의 모습은 훤히 보였다. 그는 칼을 손에 든 채, 알아듣지 못할 함성과 함께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그 목소리가 뭐라고 했는지 떠올렸고, 실망이 섞인 어조까지 인식했다. 그리고 오른쪽 숲에서 비슷한 목소리가 경악하며 외쳤다.
“조? 뭐야? 조, 뭐야?”
왼편 숲에서는 가지들이 부러지고 고함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로저가 누군가를 붙잡은 게 분명했다.
“로저!” 그녀가 소리쳤다. “로저, 그만해! 비어즐리 형제야!”
그녀는 넘어지면서 돌을 놓쳤고, 이제야 일어나며 손에 묻은 흙을 치마에 문질렀다. 심장은 아직도 쿵쾅거렸고, 엉덩이는 멍이 들었으며,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충동과 동시에 두 형제를 당장 족치고 싶은 욕구가 뒤섞였다.
“케지 비어즐리, 어서 거기서 나와!” 그녀가 고함쳤다. 이어 한 번 더, 더 크게 외쳤다. 케지는 어머니가 편도와 아데노이드를 제거해준 이후 청력이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귀가 어두웠다.
덤불이 크게 흔들리더니 케지아 비어즐리가 나타났다. 어깨엔 큼직한 몽둥이를 둘러멘 채였고, 그녀를 보자 머쓱하게 그걸 뒤로 감췄다.
그 와중에 더 요란한 소리와 약간의 욕설을 동반하며, 로저가 조시아 비어즐리의 가냘픈 목덜미를 붙잡고 나타났다.
“대체 뭘 하는 짓이야, 이 자식들아?” 로저가 조를 형 곁으로 밀쳐 세우며 말했다. “내가 진짜 너희 죽일 뻔한 거 알아?”
브리아나는 희미한 달빛 속에서 조의 얼굴에 일순 떠올랐다 사라진 냉소적인 표정을 알아챘다. 대신 그는 곧 진지한 사과의 표정으로 바꿨다.
“죄송합니다, 맥 선생님. 누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산적인 줄 알았습니다.”
“산적이래?” 브리아나는 웃음이 치밀었지만 꾹 눌렀다. “그 단어는 또 어디서 났대?”
“아, 그게…” 조는 발끝을 보며 손을 뒤로 감췄다. “리즈 양이 책을 읽어줬는데요, 제이미 선생님이 가져오신 책이요. 거기서 나왔어요. 산적 얘기.”
“그랬구나.” 그녀는 로저를 바라봤고, 로저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화가 풀리고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해적 가우』야. 디포 작품이지.”
“아, 그렇지.” 로저는 단검을 칼집에 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산적이 나타날 거라 생각한 거지?”
이번엔 청력에 오락가락하던 케지가 그 질문을 듣고 대답했다. 그는 형만큼이나 진지했지만, 목소리는 컸고 단조로웠다. 청각 장애로 인한 말투였다.
“린지 아저씨를 우연히 만났는데요,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더치맨스 크리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셨어요. 전부 불에 타버렸다면서요. 진짜인가요?”
“모두 죽었지.” 로저의 목소리에서는 더는 농담기가 없었다. “그래도 그게 너희가 나무 뒤에 숨어 몽둥이 들고 있던 이유는 아니잖니?”
“그게요, 선생님. 맥길리브레이 댁이 꽤 크잖아요. 통 제조소도 있고, 새 집도 있고, 길가에 위치해 있고—그래서요, 만약 제가 산적이라면, 딱 그런 데를 노릴 것 같아서요.” 조가 설명했다.
“그리고 리즈 양도 있고, 아버님도 있고… 맥 선생님 아들도 있잖아요.” 케지가 덧붙이며 강조했다. “해치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 로저가 살짝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산적들은 여긴 안 올 거다. 더치맨스 크리크는 멀어.”
“네, 선생님.” 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산적이란 건… 어디든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브리아나는 다시금 속이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있을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로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집까지 가자. 젬만 데리러 갈 거야. 프라우 우테가 벽난로 옆에 잘 자리 마련해주실 거야.”
비어즐리 형제는 서로 아무 말 없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이 생겼고—작고 날렵하며, 짙은 머리카락을 가졌고, 케지의 청각장애와 조의 엄지에 있는 둥근 흉터만이 그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두 사람의 미세한 표정 변화가 똑같이 나타나는 걸 보는 건 꽤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어떤 대화가 그 짧은 눈빛 속에서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론은 빠르게 정해진 듯했다. 케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형에게 판단을 맡겼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조시아가 공손히 말했다. “저희는 여기서 계속 지킬게요.”
그리고 그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채, 두 사람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낙엽과 자갈을 밟으며.
“조! 잠깐만!” 브리아나는 외쳤다.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손끝이 뭔가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예, 아씨?”
조사이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 팔꿈치 옆에 나타났다. 너무 갑작스러워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의 쌍둥이 형제는 그런 성격이 아니지만, 조는 남 몰래 다가오는 데 능했다.
“아! 어, 거기 있었구나.”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독나무로 조각한 작은 호루라기를 내밀었다. 이건 그녀가 제르맹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거요. 망을 보겠다고 마음먹은 거면, 이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누가 다가오면 도움을 요청하는 데 쓰세요.”
조 비어즐리는 호루라기를 처음 본 듯했지만, 모른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물건을 손에 쥔 채 이것저것 살펴보며 눈길은 피했다.
로저가 그의 손에서 그것을 가져가 입에 대고 힘차게 불었다. 갑작스런 고음에 숲의 밤은 산산조각났다. 놀란 새들이 나무에서 떼 지어 날아올랐고, 곧 커다란 눈으로 경악한 케지 비어즐리가 숲을 헤치고 달려 나왔다.
“이 쪽으로 부는 거야.” 로저는 호루라기의 한쪽 끝을 가리키며 다시 조에게 건넸다. “입술을 살짝 오므려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조는 속을 감추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눈을 반짝이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고, 즉시 쌍둥이 형에게 보여주러 돌아섰다. 브리아나는 문득, 이 두 형제가 단 한 번이라도 크리스마스 아침이나 무언가를 선물 받은 경험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하나 만들어줄게.” 그녀는 케지에게 말했다. “그러면 둘이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겠지. 산적이 나타나면 말이야.”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네, 아씨! 정말 그렇게 할게요!” 케지는 그녀에게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형이 손에 쥐어준 호루라기를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세 번 불어!” 로저가 그들에게 외치며 브리아나의 팔을 잡았다.
“네, 선생님!” 어둠 속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참 뒤, 희미한 “감사합니다, 아씨!”가 따라왔고, 이어 연달아 숨찬 소리와 헐떡임,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높은 호루라기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리즈가 예절도 가르쳤나 보지?” 로저가 웃으며 말했다. “글자만 가르친 게 아니라.”
그는 말끝을 흐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근데 정말로 문명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녀는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대답했다.
“정말?” 그는 어둠 속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놀란 목소리가 분명했다. “농담이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그렇게 자란 걸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봐.”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호루라기 다룰 때 그 표정 봤지? 평생 누구한테 장난감이나 선물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 문명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게 그런 거라면, 우리 젬은 철학자나 예술가가 되겠군. 버그 아주머니가 애를 엄청 예뻐하잖아.”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그녀는 관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도, 리즈도, 엄마도, 집에 있는 사람 전부가 그래.”
“뭐, 그렇지.” 로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쟁자가 생기면 달라질 거야. 제르맹은 망가질 걱정 없잖아?”
제르맹은 퍼거스와 마르살리의 장남으로, 늘 두 명의 여동생들—‘지옥 고양이들’이라 불리는—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빠를 따라다니며 놀리고 괴롭히는 데 열중했다.
브리아나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속엔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 또 아이를 갖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롤러코스터 꼭대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숨이 차고, 속이 조이고, 흥분과 공포 사이 어딘가에 멈춰 선 듯한 느낌. 특히나 사랑을 나눈 기억이 아직도 부드럽게, 수은처럼 배 속에 남아 있는 지금 같은 밤엔 더더욱.
로저도 그녀의 그런 감정을 눈치챈 듯했다. 그는 더는 그 주제를 이어가지 않고, 그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공기는 아직 차가웠고, 겨울의 끝자락이 골짜기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럼 퍼거스는 어때?” 그가 앞서 나누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듣기로는 걔도 어릴 적이 별로 안 좋았다더만, 꽤나 문명적으로 보이던데?”
“내 숙모 제니가 열 살 때부터 키웠어.” 그녀는 반박하듯 말했다. “당신은 숙모 제니를 본 적이 없지만, 진짜 대단한 분이야. 그분이라면 히틀러도 문명인으로 만들었을 거야. 게다가 퍼거스는 숲속이 아니라 파리에서 자랐잖아—비록 그게 매춘굴이었다 해도. 그런데 마르살리 말 들어보면, 꽤 고급스러운 곳이었던 것 같더라.”
“오, 그래? 무슨 얘기 했는데?”
“그냥, 퍼거스가 가끔 해줬다는 이야기들. 손님들 얘기, 그리고 그… 여자들 얘기.”
“‘매춘부’라고 말은 못 하겠는 거야?” 로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어둠 속이라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가 더 놀렸을지도 모른다.
“난… 가톨릭 학교 나왔거든.” 그녀는 방어적으로 말했다. “초기 교육이 그렇다니까.”
정말 그랬다. 그녀는 어떤 단어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거나 분노에 휩싸인 상태가 아니면 도무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근데 당신은 왜 괜찮은 거야? 당신은 목사님 아들인데.”
그는 약간 쓴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같은 이유는 아니지. 친구들 앞에서는 일부러 욕하고 사고 치고 그래야 남자라고 인정받았거든.”
“어떤 사고?” 그녀는 호기심이 동했다. 로저는 자신이 인버네스에서 자랄 때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가끔 흘리는 이야기 조각들이 그녀에겐 소중했다.
“음… 담배 피우고, 맥주 마시고, 남자 화장실 벽에 음담패설 쓰고.”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실려 있었다. “쓰레기통 엎고, 자동차 바퀴 바람 빼고, 우체국에서 사탕 훔치고. 한때 꽤 악동이었지.”
“인버네스의 공포였구먼? 혹시 갱단도 있었어?” 그녀가 놀리듯 말했다.
“있었지.” 그는 웃었다. “게리 맥밀런, 바비 코도, 그리고 더기 뷰캐넌. 나는 항상 따돌림 당했지. 목사 아들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잉글랜드 사람이라 이름도 영국식이었으니까. 그래서 항상 나도 거친 남자라는 걸 증명하려고 애썼어. 그러다 보니 항상 제일 먼저 말썽에 휘말렸고.”
“당신이 소년범이었다니, 전혀 몰랐네.” 그녀는 그런 모습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오래 가진 않았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열다섯 되던 여름, 목사님이 날 청어잡이 배에 태워서 바다로 내보냈거든. 인성을 교정하려고 했는지, 감옥을 피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냥 집에 있으면 꼴도 보기 싫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효과는 있었어. 정말 거친 남자들을 만나고 싶으면, 게일어 쓰는 어부들과 바다에 나가보라니까.”
“기억해둘게.” 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코로 킁킁거렸다. “그럼 친구들은 어떻게 됐어? 당신 없이 착하게 살았어?”
“더기는 군대에 갔고,” 그는 약간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리는 아버지 가게 물려받았어—담배 가게였지. 바비는… 음, 바비는 죽었어. 그 해 여름, 오반 앞바다에서 사촌이랑 랍스터 잡다 물에 빠졌어.”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며 어깨를 기대었다.
“안됐네.” 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렸다.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아직은 안 죽었잖아.”
로저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과 안타까움이 섞인 소리를 냈다.
“그게 위안이 되긴 해?” 그녀가 물었다. “아니면, 오히려 더 끔찍하게 느껴져?”
그가 말하도록 놔두고 싶었다. 목 매달려 목소리를 잃은 이후로, 이렇게 오래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려 하면 목이 조여왔고, 늘 기침하거나 소리를 잃곤 했다.
지금은 목소리가 거칠긴 해도, 말은 술술 나왔다. 기침도 없었고, 편안했다.
“둘 다.”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그 묘한 소리를 냈다. “어떻게 됐든 다시는 못 볼 사람이지.”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 생각을 밀어냈다.
“너는 네 예전 친구들 자주 떠올려?”
“아니, 별로.”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좁아지는 산길에서 그녀는 그의 팔에 팔을 끼고 바짝 붙었다. 곧 마지막 커브를 돌면 맥길리브레이 댁이 보일 것이었다.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거든.”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 없는 것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조랑 케지는 그냥 노는 걸까?” 그녀가 물었다. “아니면 뭔가 꾸미는 걸까?”
“뭘 꾸민다는 건데?” 그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며 받아주었다. “설마 밤중에 강도질이라도 하려고 숨어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
“지키겠다는 말은 진심일 거야.” 그녀는 확신했다. “리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테니까. 다만—”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들은 숲을 빠져나와 수레길에 들어섰다. 길가 너머로는 급경사가 있었고, 밤에는 마치 검은 벨벳 구렁처럼 보였다. 낮에 보면 쓰러진 나무, 진달래 덤불, 레드버드와 개나리, 오래된 포도덩굴과 덤불들로 뒤엉켜 있을 것이다.
길은 아래쪽으로 한 바퀴 돌며 스위치백을 그리고, 아래쪽 맥길리브레이 집으로 부드럽게 이어졌다.
“불빛이 아직 켜져 있어.” 그녀는 약간 놀라며 말했다.
작은 건물들—오래된 집, 새 집, 로니 싱클레어의 통 제조소, 다이 존스의 대장간과 오두막—은 대부분 어두웠지만, 맥길리브레이 댁의 새 집 아래층 창문은 셔터 틈새로 불빛이 줄처럼 새어나오고 있었고, 집 앞의 모닥불은 밤 속에 찬란한 빛 덩어리를 만들고 있었다.
“케니 린지일 거야,” 로저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비어즐리 형제들이 그를 만났다고 했잖아. 아마 소식을 전하려고 들렀겠지.”
“음. 그럼 우리도 조심해야겠네. 걔네도 산적을 경계하고 있다면, 움직이는 건 뭐든 쏠지도 모르잖아.”
“오늘 밤은 아니야. 파티잖아, 기억 안 나? 근데 아까 뭐라고 했지? 비어즐리 형제들이 리지를 지킨다던 얘기?”
“아.”
브리아나는 발끝이 뭔가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녀는 넘어진 걸 피하려고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우웁! 그냥… 누구로부터 리지를 지키려는 건지, 그게 헷갈린다는 거였어.”
로저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내가 만약 맨프레드 맥길리브레이라면, 리지한테 정말 잘해야 할 거란 얘기지.”
브리아나가 낮게 말했다. “엄마는 비어즐리 형제들이 리지 뒤를 개처럼 따라다닌다고 하지만, 아니야. 걔네는… 길들여진 늑대처럼 따라다녀.”
“이언 말로는 늑대는 길들일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서두르자. 불 꺼지기 전에 도착해야 해.”
커다란 통나무집은 말 그대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환한 불빛이 쏟아져 나왔고, 집 정면에 줄지어 있는 좁고 긴 화살 구멍 모양의 창들에서도 빛이 새어나왔다. 불빛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들이 오가고 있었고, 피들 소리가 어둠을 뚫고 아득히 들려왔다. 가느다랗고 맑은 선율이 바람을 타고 구운 고기 냄새와 함께 퍼져 나왔다.
“이제 셍가가 진짜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로저가 말했다. 그들은 이제 마지막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와 사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브리아나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누구한테 갔다고 생각해? 로니 싱클레어일까, 독일 청년일까?”
“오, 내기야? 뭐가 걸렸는데?”
그녀는 말하며 발이 반쯤 묻힌 돌에 걸려 비틀거렸다. 로저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단단히 잡았다.
“진 사람이 식료 창고 정리하기.”
“콜.” 그녀는 즉시 대답했다. “난 하인리히한테 갔다고 봐.”
“그래?” 그는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바로는 다섯 대 셋으로 로니 쪽이 우세였어. 우테 아주머니는 만만한 분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브리아나는 인정했다. “만약 힐다나 잉가였다면 승부도 안 됐겠지만, 셍가는 엄마 성격 그대로야. 아무도 셍가한테 이래라저래라 못 해—우테 아주머니도 예외는 아니지.”
“그나저나 ‘셍가’라는 이름은 어디서 났대?” 그녀가 덧붙였다. “살렘 근처엔 잉가도 많고 힐다도 많은데, 셍가는 처음 들어봐.”
“아, 그건 살렘에선 못 들어봤겠지. 그건 독일식 이름이 아니야—스코틀랜드식이지.”
“스코틀랜드?” 그녀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가 대답하며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애그니스’를 거꾸로 쓴 거야. 그런 이름을 가진 애는 태생부터 고집쟁이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
“장난이지? 애그니스를 거꾸로 썼다고?”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셍가’라는 이름을 가진 애들 몇 명은 실제로 봤어.”
브리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다른 이름들도 그렇게 거꾸로 써?”
“거꾸로 쓰기?” 그는 잠시 생각했다. “학교에 ‘애드닐(Adnil)’이라는 애가 있었고, 동네 할머니들 심부름해주던 식료품점 꼬마가 있었는데 이름이 ‘키리(Kirry)’야. 스펠링은 ‘C-i-r-e’였지.”
브리아나는 그가 놀리는 건 아닌가 하고 예리하게 쳐다봤지만, 진지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 말이 맞았어. 스코틀랜드 사람들 진짜 이상해.”
그녀는 웃었다. “그럼 당신 이름을 거꾸로 쓰면—”
“레고르(Regor),” 로저가 맞장구쳤다. “고질라 영화에 나올 법하지 않아? 거대한 장어 아니면, 눈에서 광선 쏘는 딱정벌레 같은 거.”
그는 그 생각이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
“생각해본 적 있지?”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 “어떤 게 되고 싶었어?”
“어릴 땐 광선 쏘는 딱정벌레가 제일 멋지다고 생각했지.” 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근데 나중에 바다에 나가서 가끔씩 큰 모레이 장어를 그물로 건져 올리다 보니까, 그건 정말 어두운 골목에서 마주치기 싫은 생물이야.”
“고질라보단 민첩하지.” 그녀는 몸을 떨며 말했다.
그녀도 모레이 장어를 실제로 본 적이 한 번 있었다. 스프링 강철과 고무로 이루어진 듯한 몸통, 번갯불처럼 빠른 속도, 입안 가득한 면도날 같은 이빨. 스코틀랜드 북쪽의 작은 항구 마을 맥더프에서 어선이 하역되는 걸 구경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와 로저는 낮은 돌담에 기대 갈매기들이 바람에 떠다니는 걸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래쪽 어선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부들이 갑자기 갑판에서 물러서며 뭔가를 피하고 있었다.
어두운 물결 하나가 반짝이는 은빛 물고기 더미 사이를 휘저으며 지나가더니, 난간 아래로 튀어 나와 부두의 젖은 돌 위에 떨어졌다. 고압 전선처럼 꿈틀거리며 날뛰던 그것은, 한참 동안 어부들을 공포에 빠뜨리더니, 마침내 고무장화를 신은 한 남자가 용기 있게 달려들어 발로 차서 바다로 되돌려보냈다.
“사실 장어들이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니야.” 로저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도 그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바다 밑에서 끌려 올라왔는데, 저항 좀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그러게 말이야.”
브리아나는 조용히 대답하며 그들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로저의 손을 잡아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의 단단하고 차가운 손이 이상할 만큼 위안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꽤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모닥불 연기와 함께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대화의 파편들이 찬 밤공기 속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고, 그녀는 검고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작은 실루엣 두 개가 불 주위에 모인 사람들 다리 사이로 휙 지나가는 걸 보았다. 할로윈 도깨비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저게 설마 젬일 리는… 아니야. 젬은 더 작지. 게다가 리지가 설마—
“메즈(Mej),” 로저가 말했다.
“뭐라고?”
“젬을 거꾸로 쓴 거야,” 그가 설명했다. “그냥… 걔랑 같이 고질라 영화 보면 진짜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혹시 걔도 광선 쏘는 딱정벌레가 되고 싶어할지도 모르지. 재밌을 거야, 안 그래?”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아련하고, 그리운 기운이 묻어났다. 브리아나는 목이 메어와 그저 그의 손을 꼭 쥐었고, 꿀꺽 침을 삼켰다.
“젬한테 고질라 이야기 해줘.”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어차피 상상이잖아. 내가 그림도 그려줄게.”
그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브리. 너 그 그림 진짜 그리기만 해봐. 너 마녀라고 돌 맞을걸? 고질라는 요한계시록에서 튀어나온 괴물 같다고들 하더라고—아니, 그런 얘기 들었었지.”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에이거(Eigger).”
“누구… 아, 잠깐,” 그녀는 머릿속을 되감듯 되물었다. “레지? 레지 누구?”
“목사님. 레버런드 말이야.”
그의 외삼촌이자 양아버지. 로저의 목소리엔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 끝엔 향수 어린 감정이 스며 있었다.
“토요일마다 같이 괴물 영화 보러 갔거든. 에이거와 레고르. 그리고 한 번은 교회 부인회에서 갑작스레 들이닥친 적이 있었지. 그래엄 부인이 허락 없이 들여보내는 바람에 말이야. 그분들이 목사님 서재 문을 열었는데, 우리 둘이 블록이랑 수프 깡통으로 만든 도쿄 시내를 짓밟으면서 ‘으르렁!’ 하고 괴물처럼 뛰어다니고 있었지. 그때 그 부인들 얼굴, 진짜 볼만했어.”
브리아나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분을 내가 만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나도 네가 만났더라면 좋았을 거야.”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레버런드가 너를 정말 좋아하셨을 거야, 브리.”
그가 말하는 동안, 잠시 동안 세상은 사라진 듯했다. 그들은 마치 인버네스에 있는 듯, 목사님의 서재 안에 나란히 앉아 창밖으로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거리의 차 소음을 배경 삼아 따뜻하게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순간은 종종 찾아왔다. 둘만 있을 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 하지만 늘 그렇듯, 그 순간은 어떤 작은 계기로 금이 간다—이번엔 모닥불가에서 누군가 외치고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게 그 계기였다.
그 순간, 둘만의 시간은 와르르 무너지고, 다시 이 시대의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브리아나는 불현듯 떠올렸다.
그가 사라진다면, 나는 이 기억들을 나 혼자 다시 꺼낼 수 있을까?
한순간, 원초적인 공포가 브리아나를 덮쳤다.
로저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중심을 잃는 듯했다. 미래와 이어진 유일한 닻이자 기준점이 사라지고, 오직 그녀 자신의 기억만으로 시간을 붙잡아야 한다면—그 시간은 곧 흐릿한 꿈이 되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때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감각도 잃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막연한 환상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녀는 차가운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장작 타는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를 타고 들어왔다. 걷는 동안 그녀는 발바닥을 흙에 단단히 눌러 댔다. 지금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되찾기 위해.
“마마마마마!”
작은 그림자가 모닥불 주변의 혼잡한 틈에서 튀어나와 그녀를 향해 미사일처럼 날아들었다. 아이는 그녀의 무릎에 그대로 부딪혀 왔고, 브리아나는 반사적으로 로저의 팔을 움켜잡았다.
“젬! 여기 있었구나!”
그녀는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그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젬의 머리에서는 염소, 건초, 매콤한 소시지 냄새가 섞인 익숙한 향이 났다. 아이는 묵직했고, 아주 확실히 ‘현실’이었다.
그때 우테 맥길리브레이가 몸을 돌려 그들을 보았다. 넓은 얼굴에 일그러진 찡그림이 떠올랐지만, 금세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녀가 크게 인사를 외치자,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그들을 반겼다. 곧 무리가 몰려들며 온갖 질문이 쏟아졌고, 뜻밖의 방문에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더치 가문의 일에 대해 묻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케니 린지가 화재 소식을 먼저 전한 덕분에 큰 설명은 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지만, 이미 공포스러운 상상은 다 소비한 뒤였다. 모두 다른 이야기로 옮겨가고 있었고, 브리아나는 다행이라 여겼다. 전나무 아래 차가운 무덤의 기억은 아직 가슴 한켠에 서늘하게 남아 있었기에, 다시 그 순간을 말로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불빛 앞에는 약혼한 커플이 마주 보며, 뒤집은 양동이 위에 나란히 앉아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닥불의 주홍빛 속에서 행복이 흘러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겼다.” 브리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저 둘 정말 행복해 보이지 않아?”
“그렇네.” 로저도 동의했다. “로니 싱클레어는 아닐 거야, 그치? 걘 와 있나?”
그는 둘러보았고, 브리아나도 고개를 돌렸지만, 통 제작자인 로니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저기 작업실에 있는 것 같아.” 그녀는 로저의 손목에 손을 얹으며, 길 반대편의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그 쪽에는 창문이 없었지만, 닫힌 문 틈새로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로저는 모닥불 주위의 사람들과, 어둠에 잠긴 작업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테의 친척들이 약혼자와 친구들과 함께 살렘에서 말을 타고 와 있었고, 그들이 가져온 엄청난 양의 흑맥주는 분위기를 더욱 흥겹게 만들고 있었다. 공기 중엔 홉의 쌉싸름한 향이 감돌았다.
반면, 로니의 작업실은 쓸쓸하고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브리아나는 저 사람들 중 누가 로니가 없는 걸 눈치챘을까 생각했다.
“잠깐 가서 얘기 좀 해볼까?” 로저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위로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그리고 독한 술 한 잔도?”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며 집 쪽을 가리켰다. 로빈 맥길리브레이가 열린 문 안쪽에서 위스키를 따르고 있었고, 엄선된 몇몇 친구들이 그 곁에 앉아 있었다.
“아마 벌써 한 잔 들이켰겠지.” 로저는 건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떠나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레 비켜갔다. 곧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지만, 브리아나는 통 제작소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잠시 로저의 키 큰 실루엣이 문 안의 불빛에 비치더니 이내 안으로 사라졌다.
“물 마실래, 엄마!”
젬미는 올챙이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에 내려달라고 보챘다. 그녀는 아이를 내려놓았고, 그는 재빨리 달려 나가며 튀듯 뛰어가다, 옥수수 튀김을 담은 접시를 든 통통한 아주머니를 거의 넘어뜨릴 뻔했다.
튀김에서 올라오는 고소한 향에 그녀는 자신이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젬을 따라 음식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서 리지가 마치 ‘거의 집안의 딸’처럼 당당히 서서, 그녀에게 사우어크라우트와 소시지, 훈제 달걀, 옥수수와 호박이 섞인 무언가를 담아주고 있었다.
“네 남자친구는 어디 갔어, 리지?” 그녀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지금쯤 같이 앉아서 다정하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걔요?” 리지는 마치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기웃했다. 흥미는 있지만 긴급하지는 않은 어떤 것 말이다.
“맨프레드 말씀이죠? 걔는… 저쪽에 있어요.”
리지는 모닥불의 불빛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서빙 스푼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맨프레드 맥길리브레이, 그녀의 약혼자는 다른 청년 서너 명과 함께 팔짱을 끼고 좌우로 흔들리며 독일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가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듯, 각 절마다 깔깔 웃고 장난으로 서로를 밀치기 일쑤였다.
“여기, 셰츤(Schätzchen)—‘달링’이란 뜻이에요, 독일어로요.”
리지가 몸을 숙여 젬미에게 소시지를 한 입 먹이며 설명했다. 젬은 굶주린 바다표범처럼 덥석 받아먹고는 우물우물 씹으며 “와가 깅크,” 중얼거리더니 어둠 속으로 슬그머니 걸어가 버렸다.
“젬!” 브리아나는 뒤따라 가려 했지만, 테이블 쪽으로 몰려오는 인파에 막혀 길이 끊겼다.
“아, 너무 걱정 마세요.” 리지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다들 저 애가 누구인지 아니까, 해코지 당할 일은 없어요.”
그래도 브리아나는 여전히 뒤를 쫓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곧 젬 곁에 작고 금발인 머리가 불쑥 솟는 걸 보고 멈췄다. 제르맹이었다. 젬의 절친한 친구. 제르맹은 두 살 많았고, 다섯 살 치고는 세상물정을 훨씬 많이 아는 편이었다—그건 거의 대부분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브리아나는 속으로 혹시 군중 속에서 소매치기나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나중에 몰래 뒤적여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르맹이 젬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기에, 브리아나는 잠시 안심하고 리지, 잉가, 힐다와 함께 불에서 조금 떨어진 지푸라기 더미 위에 앉았다.
“그럼 당신의 남자친구는 어디 있나요?” 힐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 덩치 크고 잘생긴 새까만 악마 말이에요?”
“아, 그 사람?” 브리아나는 리지를 흉내 내며 말했다. 그러자 네 사람 모두 얌전함은 저 멀리 던져두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흑맥주가 꽤 돌고 있는 분위기였다.
“로니 위로해주러 갔어요.” 브리아나는 어두운 통 제작소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셍가의 선택 때문에 당신 어머니가 많이 속상하셨대요?”
“아휴, 속 터지셨지.” 잉가가 한껏 눈을 굴리며 말했다. “엄마랑 셍가랑 싸우는 거 들어봤어야 해요. 망치와 집게처럼, 들이치고 또 들이치고. 아빠는 낚시 간다고 나갔다가 삼 일 동안 집에 안 들어왔어요.”
브리아나는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았다. 로빈 맥길리브레이는 평화로운 삶을 좋아했는데, 아내와 딸들과 함께 살며 그런 삶을 꿈꾸는 건 어림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뭐, 그렇지.” 힐다가 철학적인 말투로 말했다. 만삭에 가까운 첫 임신의 무게를 덜기 위해 몸을 약간 뒤로 젖히며 앉았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그렇게 뭐라 하시기도 어렵지. 하인리히는 어쨌든 엄마 사촌의 아들이니까. 비록 가난하더라도.”
“하지만 젊잖아.” 잉가가 현실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아빠 말로는 하인리히는 아직 젊으니까 부자 될 시간도 plenty 있대.”
로니 싱클레어는 부자라 하기는 좀 그랬지만, 셍가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다. 반면 그는 통 제작소도 갖고 있었고, 맥길리브레이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의 절반도 그의 소유였다.
우테는 큰딸들과 각각 재산 있는 남편에게 시집보낸 뒤, 이번에도 분명 안정적인 결혼을 바란 듯 셍가와 로니의 혼인을 밀어붙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상황이면 좀 불편할 수도 있겠네요.” 브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로니가 계속 가족이랑 같이 살게 되면 말이죠—”
그녀는 모닥불 옆에서 서로 케이크를 먹여주는 약혼 커플 쪽을 고개로 가리켰다.
“허우!” 힐다가 눈을 굴리며 외쳤다. “난 여기 같이 안 살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잉가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지만, 덧붙였다. “그래도 엄마는 이미 다음 수순 생각 중이야. 로니한테 맞는 아내감 찾으려고 눈 반짝이고 계셔. 저기 봐봐.”
그녀는 음식 테이블 쪽으로 턱짓을 했다. 거기서 우테는 독일계 여성들 몇 명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가 찍은 사람 누굴까?” 잉가는 어머니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첸? 아니면 네 남편 아치의 사촌? 그 사팔뜨기—쎄오나?”
서리 카운티 출신 스코틀랜드인과 결혼한 힐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마는 독일 여자 원하실걸.” 그녀가 말했다. “왜냐면 말이지, 로니가 죽고 그 여자가 재혼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시는 거야. 독일 여자면, 엄마가 또 자기 조카나 사촌 중 하나랑 재혼시키기 쉬울 테니까—재산이 결국 다시 집안으로 돌아오겠지, 안 그래?”
브리아나는 세 자매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극히 실용적인 논조로 로니의 결혼 상대를 논하는 걸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로니 싱클레어는 이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하지만 1년 넘게 맥길리브레이 가족과 함께 지냈다면, 우테의 성향쯤은 대충 파악했으리라.
그래도 나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야, 브리아나는 속으로 감사하며 리지를 찾았다. 리지는 맨프레드와 결혼하면 우테와 함께 살아야 할 터였다.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그때 “웨미스 씨”라는 이름이 들려왔고, 그녀는 대화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건 리지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였다.
“게르트루드 이모가 딱이야.” 힐다가 선언하듯 말하며 입을 손으로 가볍게 가렸다가 트림을 숨겼다. “그분도 과부잖아. 아저씨한테는 제일 좋지.”
“게르트루드 이모라면 웨미스 씨는 1년도 못 버텨.” 잉가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 이모는 웨미스 씨 두 배는 돼. 피곤해서 죽기 전에, 자다가 깔려 죽을 걸?”
힐다가 입을 틀어막았지만, 놀라서라기보단 웃음을 참으려는 듯했다. 브리아나는 그녀도 제법 맥주를 마셨다고 짐작했다. 힐다의 모자는 비뚤어져 있었고, 불빛 속에서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근데, 아저씨도 별로 신경 안 쓰시는 것 같은데?” 힐다가 맥주 마시는 사람들 너머를 가리켰다.
브리아나도 쉽게 웨미스 씨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머리는 딸처럼 부스스한 연한 색이었다. 그는 앞치마와 두건을 쓴 통통한 여성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여자는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그런데 곧 우테 맥길리브레이가 그쪽으로 향했고, 그녀의 뒤를 따라 키 큰 금발 여인이 살짝 주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앞치마 아래로 두 손을 모은 채 조심스럽게 걸었다.
“어머, 저 여자 누구야?” 잉가는 거위처럼 목을 길게 뺐고, 힐다가 팔꿈치로 그녀를 툭 치며 속삭였다.
“Lass das, du alte Ziege! 엄마가 이쪽 본다!”
리지도 무릎을 세우고 몸을 반쯤 일으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누구—?” 그녀는 부엉이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곧 맨프레드가 그녀 곁 짚더미 위에 털썩 앉았다. 그는 익살맞은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잘 있었어, 헤어츠헨(Herzchen)?” 그가 말하며 키스하려 했다.
“저 여자 누구야, 프레디?” 리지는 능숙하게 그의 팔을 피하며, 고개로 금발 여인을 가리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우테 부인과 함께 웨미스 씨에게 인사 중이었다.
맨프레드는 잠깐 눈을 깜빡였지만, 곧 대답했다.
“아, 저 분은 프라우라인 베리쉬야. 베리쉬 목사님의 누님.”
잉가와 힐다가 흥미로워 보이는 눈빛을 나누며 낮은 감탄사를 흘렸고, 리지는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가 곧 이마를 펴고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웨미스 씨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프라우라인 베리쉬를 향해 말을 건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베리쉬 양은 브리아나만큼 키가 컸다.
그래, 저래서 아직도 프라우라인이구나.
브리아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모자 사이로 보이는 부분에 회색 줄무늬가 섞여 있었고, 얼굴은 다소 평범했지만 눈동자는 고요하고 따뜻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아, 개신교 신자였구나.” 리지는 무심한 듯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말투에는, 프라우라인 베리쉬는 아버지의 짝으로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좋은 분이잖아, 저 프라우라인.”
맨프레드는 더는 웨미스 씨나 베리쉬 양에 관심이 없어진 듯, 리지의 손을 잡아 억지로 끌어일으키더니 춤추는 무리 쪽으로 이끌었다. 리지는 마지못해 따라갔지만, 브리아나는 그들이 춤판에 도착할 즈음 리지가 맨프레드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그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모닥불빛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셍가와 하인리히보다는 확실히 더 잘 어울렸다—하인리히는 키는 컸지만 여윈 데다 얼굴도 마치 도끼처럼 각졌고.
잉가와 힐다가 다시 독일어로 말다툼을 시작한 덕분에, 브리아나는 아무 방해 없이 저녁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워낙 배가 고팠기에 뭐든 맛있었겠지만, 새콤하고 아삭한 사우어크라우트에 육즙과 향신료가 가득한 소시지는 정말이지 최고의 만찬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무 접시에 남은 국물과 기름기를 옥수수빵 한 조각으로 깨끗이 닦아 먹으며, 그녀는 문득 통 제작소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로저 몫으로 조금 남겨뒀어야 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가엾은 로니의 기분을 달래주러 간 로저—그가 얼마나 다정하고 배려 깊은 사람인지 생각하니, 자랑스러움과 사랑이 복받쳐 올랐다.
이제 구해주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접시를 내려놓고, 치마와 속치마를 정돈하며 일어날 준비를 하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휘청거리며 나오는 두 아이의 모습에 움직임을 멈췄다.
“젬?” 그녀는 놀라서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모닥불빛이 젬의 머리 위에서 막 주조된 동전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그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커다란 어둠의 연못처럼 번들거리며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젬미!”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엄마?” 하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중얼더니 그대로 다리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브리아나는 옆에 있던 제르맹이 강풍에 흔들리는 어린 나무처럼 휘청이는 걸 스치듯 보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젬의 고개를 들어 올리고 살짝 흔들었다.
“젬미! 정신 차려! 왜 그래?”
“꼬마가 완전히 만취했구먼, 아가씨.”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다소 재미있다는 듯 들렸다. “도대체 뭘 먹인 거야?”
로빈 맥길리브레이였다. 그 역시 꽤 취한 듯 몸을 앞으로 숙이며 젬을 손끝으로 슬쩍 찔렀다. 젬은 가느다란 소리로 꺽꺽 숨을 쉬었고, 맥길리브레이가 그의 팔을 들어 올렸다 놓자, 삶은 국수처럼 힘없이 떨어졌다.
“전 아무것도 안 줬어요.”
브리아나는 공포가 점점 짜증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 젬은 분명 단지 잠든 상태였고, 그의 작은 가슴이 일정한 리듬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제르맹!”
제르맹은 어느새 작은 더미처럼 주저앉아 있었고, 꿈결처럼 “알루에트”를 부르고 있었다. 그건 브리아나가 가르쳐준 그의 애창곡이었다.
“제르맹! 젬미한테 뭐 마시게 했어?”
“...쥬 뜨 플뤼메라 라 떼뜨…”
“제르맹!” 그녀는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노래는 멈췄고, 제르맹은 놀란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젬미한테 뭐 줬어, 제르맹?”
“목이 마르다 했어요, 마담.” 제르맹은 세상 순진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래서 마시게 해줬어요.”
그러고는 그의 눈이 허공을 굴더니, 마치 죽은 생선처럼 푹 꺾이며 뒤로 고꾸라졌다.
“세상에, 예수님이 토스트 위에라도 계시다니!”
잉가와 힐다는 충격받은 듯 보였지만, 브리아나는 그런 예절 걱정을 할 겨를이 없었다.
“마살리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안 왔어.” 잉가는 몸을 숙여 제르맹을 살펴보며 말했다. “애기들이랑 집에 있었거든. 페르구스는... 음, 아까 봤던 것 같긴 한데...”
“무슨 일이야?”
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로저가 서 있었고, 평소보다 편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아들이 주정뱅이가 됐어.” 그녀는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고는 로저 입에서 희미한 술 냄새가 나는 걸 감지하고 덧붙였다.
“당신이랑 똑같이 말이야.”
로저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 젬을 무릎 위로 들어 올렸다. 아이를 무릎에 기대어 앉히고, 뺨을 가볍게, 그러나 끈질기게 두드렸다.
“안녕, 메즈,”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은 거지?”
그러자 마법처럼 젬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아이는 꿈결처럼 로저를 바라보며 웃었다.
“안녕, 아빠.”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고, 로저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괜찮아.” 로저가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녀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대체 뭘 마신 거야? 맥주?”
로저는 젬의 붉게 물든 입술을 맡아보고는 말했다.
“체리 바운스 같아. 헛간 옆에 한 통 있던데.”
“맙소사!”
그녀는 마셔본 적 없었지만, 버그 부인이 그 레시피를 말해준 적이 있었다.
“체리 즙 한 부셸에 설탕 스물네 파운드 넣고 녹인 다음, 위스키로 사십 갤런 채우는 거였지.”
“괜찮아.” 로저는 그녀의 팔을 토닥였다. “저기 제르맹 맞지?”
“응.” 그녀는 몸을 기울여 확인했다. 제르맹은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고, 얼굴엔 아직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체리 바운스, 은근히 괜찮은데?”
로저는 웃었다.
“끔찍하지. 초강력 기침약 같아. 하지만 기분은 아주 좋아지더라고.”
“당신도 마셨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입술 색을 살폈지만 평소처럼 보였다.
“아니지.”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며 증명해 보였다.
“로니처럼 스코틀랜드 남자가 실연을 체리 바운스로 달래겠어? 괜찮은 위스키 있는데?”
“그건 그렇네.” 그녀는 통 제작소 쪽을 바라보았다.
벽난로 불빛은 사그라졌고, 문 윤곽도 사라져 건물 전체가 검은 숲 속에 묻힌 그림자처럼 보였다.
“로니는 어때?”
잉가와 힐다가 우테를 도우러 간 사이였다. 여자들은 음식 테이블 주변에 모여 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괜찮아, 로니는.” 로저는 젬을 풀밭에 조심스레 눕히고는 말했다.
“셍가를 사랑했던 건 아니니까. 지금 겪는 건 실연이 아니라… 음, 육체적 갈증이지.”
“아, 그렇다면 뭐.” 그녀는 건조하게 말했다. “곧 해결되겠지. 우테 부인이 알아서 해준다더라.”
“그랬지. 로니한테 아내 찾아주겠다고 했대. 로니는 뭐 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물론 욕망은 아직 꺼지질 않았지만.”
로저는 코를 찡그렸다.
“으으, 됐고. 뭐라도 먹을래?” 그녀는 아이들 쪽을 보고 일어나며 물었다. “우테랑 애들이 다 치우기 전에 뭐라도 챙겨야겠다.”
로저는 갑작스럽고 크게 하품을 했다.
“아니, 괜찮아.” 그는 눈을 깜빡이며 졸린 듯 미소 지었다. “퍼거스한테 제르맹이 어디 있는지 말하고, 가는 길에 뭐라도 좀 집어먹을게.”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약간 비틀거리며 일어나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브리아나는 다시 한 번 아이들을 살폈다. 둘 다 깊고 규칙적인 숨을 쉬고 있었고, 세상과 단절된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두 아이를 서로 바짝 붙여 놓고, 짚더미를 덮어준 다음 망토로 덮어주었다. 날이 제법 쌀쌀해졌지만, 겨울은 지나갔고, 공기엔 서리가 낄 조짐도 없었다.
잔치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조금 느긋해져 있었다. 춤은 멈췄고, 사람들은 더 작은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남자들은 모닥불 근처에 모여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듯했다. 그녀 주변에서는 가족들이 밤을 보내기 위한 둥지를 짚 위에 만들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집 안에, 또 다른 이들은 헛간에 들어갔다. 그녀는 집 뒤편 어딘가에서 기타 소리를 들었고, 한 사람의 목소리가 느릿하고 애잔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문득, 예전의 로저의 목소리가 그리워지게 만들었다. 풍부하고 다정했던 그 목소리.
그러나 그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로니를 위로하고 돌아온 후 로저의 목소리가 훨씬 나아졌다는 것을. 여전히 허스키하고, 본래의 울림은 희미하게 남아있었지만—말이 막히거나 가라앉는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던 것이다. 혹시 술이 성대를 이완시킨 걸까?
더 가능성 있는 건, 술이 로저 자신을 이완시켰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긴장감을 풀어주고, 예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건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로저가 성대를 스트레칭하고 계속 연습한다면 목소리가 나아질 거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로저는 말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건 아마 실제 말할 때의 통증 때문이든, 아니면 전보다 달라진 자신의 소리를 들을 때 느끼는 정서적인 아픔 때문이든, 어느 쪽이든 조심스러웠다.
“그럼 나도 체리 바운스를 좀 만들어볼까,” 브리아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짚 속에 잠든 두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내일 아침 숙취 셋과 함께 깨어나는 상황을 상상하자 마음이 바뀌었다. “음, 아니, 안 하는 게 낫겠다.”
그녀는 짚을 한 움큼 모아 베개를 만들고, 접어놓은 손수건을 그 위에 펴 놓았다—내일 하루 종일 옷에서 짚을 털어내게 될 건 뻔했지만. 그리고 젬을 안듯이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웠다. 두 아이 중 어느 하나라도 잠결에 몸을 뒤척이거나 구토를 하면 바로 알아차리고 깨울 수 있도록.
모닥불은 거의 다 꺼져서 이제는 불꽃이 아닌, 이글거리는 숯 위에 희미하게 깜박이는 불빛의 가장자리만 남아 있었다. 마당 여기저기에 걸려 있던 랜턴들도 모두 꺼졌거나, 아끼느라 일부러 꺼버린 모양이었다. 기타 소리도, 노래하는 목소리도 사라졌다. 빛과 소음이 사라지자, 산속의 밤은 그 틈을 틈타 깊은 고요와 차가운 어둠의 날개를 펼쳤다. 머리 위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건 그저 수천 년 떨어진 바늘구멍 같을 뿐. 브리아나는 그 거대한 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젬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그의 온기를 감싸 안았다.
잠들기 위해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지만, 사람들이 사라지고, 불탄 나무 냄새가 공기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선 잡념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축복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자비와 보호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는 내 형제들을 내게서 멀리하시고, 나의 친구들은 정녕 나를 낯설게 여기며. 나의 친족들은 나를 외면하고, 나를 잘 알던 이들은 나를 잊었나이다.”
잊지 않을게요, 그녀는 죽은 자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 말이 너무 보잘것없게 느껴졌다—너무 작고, 무력한 말.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그녀는 짧게 몸을 떨며 젬을 끌어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짚더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로저가 그녀의 뒤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는 망토를 펼쳐 그녀 위에 덮으며 조금 더듬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몸을 편안히 기대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참 긴 하루였지, 그치?”
그녀는 희미하게 신음하며 동의했다. 이제 모든 것이 고요해지고, 더 이상 말하거나 주시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순간, 몸의 모든 근육이 녹아내릴 듯한 피로를 느꼈다. 짚 한 겹 아래는 차갑고 단단한 땅뿐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밀려오는 파도처럼 다가오는 졸음을 느꼈다. 부드럽고도 피할 수 없는 파도였다.
“뭐라도 먹었어?” 그녀는 그의 다리에 손을 얹었고, 로저는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응, 맥주가 음식이라면 말이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더라.” 그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의 숨결에서는 따뜻한 홉 냄새가 풍겼다. “괜찮아.”
그의 체온이 옷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밤의 냉기가 사라져갔다.
젬은 잠든 채 항상 열을 뿜어냈다. 마치 진흙 화로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품에 안겨 있을 때면 언제나 따뜻했다. 하지만 로저는 그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엄마 말대로라면, 술이 들어간 등잔불은 기름 등잔보다 더 뜨겁게 타오른다고 했던가.
그녀는 한숨을 쉬며 로저에게 몸을 더 바짝 붙였다. 따뜻했고,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가족이 함께 있는 지금, 밤의 거대한 추위는 물러갔다. 이제 그들은 다시 함께였고, 안전했다.
로저가 허밍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진동을 등을 통해 느끼며, 어느 순간 그것을 인식했다. 분명한 멜로디는 없었지만, 그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등을 따라 전달됐다. 그녀는 그 소리를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소리를 내는 것이 성대에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저는 곧 스스로 그 소리를 멈췄다.
그녀는 다시 그를 노래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 뒤로 손을 뻗어 그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자신도 조심스레 짧은 허밍을 흉내냈다.
“흐음—음?”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며 단단히 안아왔다.
“음—흠,” 그가 낮은 소리로 응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만족감과 유혹이 섞인 소리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몸을 뒤로 젖히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려 했다. 평소 같았으면 로저는 이 정도 신호에 바로 멈췄을 테지만, 오늘은 한 손만을 떼어내더니 그대로 그녀의 다리를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목적은 분명히 치마를 걷는 것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아 끌어올려,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네 마음은 알아’라는 뜻을 담은 행동이었다.
로저는 평소엔 그녀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술기운 때문인지 그런 신호도 무시되는 듯했다. 아니면—그녀는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에 긴장했다—지금은 그녀의 반응이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걸지도.
“로저!” 그녀는 날카롭지 않게 속삭였지만, 목소리에는 분명한 제지가 담겨 있었다.
로저는 여전히 허밍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의 손은 다리를 타고 안쪽으로 올라와 그녀의 살갗에 닿았다. 젬이 그녀 품 안에서 기침하며 몸을 움찔였고, 그녀는 신호를 보내듯 로저의 정강이를 슬쩍 발로 찼다.
“정말 아름다워,”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정말….”
그의 손끝이 결국 목적지에 닿았고, 그녀는 몸을 젖히며 살짝 피하려 했다.
“로저,”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사람들이 있어.” 그리고 그녀 앞에는 아직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젬이 있었다.
그는 흐릿하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중에 “어두워”와 “아무도 안 볼 거야”라는 말이 들렸다. 그러더니 아예 치마를 움켜쥐고 걷기 시작했다.
“사랑해. 정말… 많이.” 그가 중얼거렸다.
“나도 사랑해,”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재빨리 몸을 굽히며 그녀를 뒤로 눕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당황해 하늘을 올려다봤고, 그 순간 별빛이 그의 어깨 너머로 사라졌다.
“젬—” 그녀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젬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그는 여전히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저는 익살맞은 스코틀랜드 민요를 낮은 음성으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방앗간 주인과 한 여인의 이야기였다.
“그는 그녀를 자루 위에 눕히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곡물을 빻았네… 빻았네…”
그가 은근하게 읊조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그녀는 짚더미 위에서 그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꼈다. 머리 위의 별빛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냥 받아들이고 즐기자’고 그녀는 생각했다. 짚더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컸지만, 바람소리와 주변의 다른 인기척이 그것을 삼켜 주고 있었다.
부끄러움은 잠시 묻어두고 몸을 그의 움직임에 맡기고 있었는데, 로저가 그녀의 허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다리를 내 등에 감아줘. 뒷꿈치로 내 등을 두드려 줘.”
일종의 장난기 반, 그리고 절반쯤은 로저의 숨통을 틀어쥐려는 충동에 이끌려, 그녀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그의 등에 꽉 감아버렸다. 그는 짧은 탄성을 흘리며 더욱 열을 올렸다. 어느새 주위는 잊고, 점점 더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가운데 그녀는 그대로 몸을 멈췄고, 다리는 여전히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로저는 이미 절정에 도달한 듯, 머리를 숙인 채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간질이며 속삭였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그러고는 그녀 위에 천천히 몸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귀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숨을 고르며 “고마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그녀 위에 따뜻하게 몸을 기댄 채, 깊은 숨소리를 내며 반쯤 잠든 상태로 몸을 맡겼다.
“그래요,” 그녀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천만에요.”
굳게 조였던 다리를 풀고, 그녀는 애를 써서 로저와 얽힌 몸을 하나씩 정리했다. 그들의 몸을 옷으로 대충 덮은 뒤, 다시 건초 속 둥지로 들어가 젬미를 두 사람 사이에 눕혔다.
“저기,”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로저가 미세하게 몸을 움직였다.
“음?”
“Eigger는 어떤 괴물이었어?”
그가 낮고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Eigger? 그건 거대한 스펀지 케이크였지. 초콜릿 아이싱까지 얹은. 다른 괴물들을 덮쳐서 달콤함으로 질식시켜버리는 녀석.” 그는 다시 웃었고, 갑작스러운 딸꾹질을 터뜨리며 건초 속에 몸을 묻었다.
“로저?” 그녀가 잠시 후 부드럽게 불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녀는 젬의 잠든 몸 너머로 손을 뻗어 로저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노래 불러줘,” 그녀는 속삭였다. 그가 이미 잠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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